
베를린 파리저 광장에서 바라본 브란덴부르크 문.
By Dietmar Rabich,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독일 베를린의 중심에 서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 가운데 하나다. 이 건축물이 특별한 것은 단순히 오래되었거나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에서 시작해 나폴레옹 전쟁과 독일 제국, 나치 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 냉전과 베를린 장벽, 그리고 독일 통일까지 200년이 넘는 독일 근현대사가 이 문을 지나갔다.
베를린의 서쪽 관문
브란덴부르크 문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으로 1788년부터 1791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당시 베를린에는 도시를 둘러싼 관세 장벽(Akzisemauer)이 있었고 여러 개의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역시 그중 하나였다.

베를린의 대표 대로, 운터 덴 린덴 (가로수길 끝에 브란덴부르크 문이 보인다)
By Leonhard Lenz – Own work, CC0, wikimedia commons.
그러나 이 문이 특별했던 것은 그 위치였다. 동쪽으로는 베를린의 대표적인 대로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이 왕궁 방향으로 이어졌고, 서쪽에는 왕실의 사냥터였던 티어가르텐(Tiergarten)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치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문은 평범한 성문이라기보다 프로이센 수도의 대표적인 서쪽 관문으로 자리 잡았다.

브란덴부르크 문 서쪽으로 펼쳐진 베를린의 거대한 도심 공원, 티어가르텐
By A.Savin – Own work,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훗날 베를린의 관세 장벽과 다른 성문들은 사라졌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은 살아남았다. 오늘날 옛 베를린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이다.
아테네를 닮은 문
건축을 맡은 사람은 프로이센의 건축가 카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였다.
그가 모델로 삼은 것은 고대 로마의 개선문이 아니라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관문인 프로필라이아(Propylaea)였다. 그래서 브란덴부르크 문에는 우리가 흔히 개선문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반원형 아치가 없다. 대신 거대한 도리스식 기둥들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다섯 개의 통로를 이루는 브란덴부르크 문의 12개 도리스식 기둥
By Dietmar Rabich,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양쪽에 각각 여섯 개씩 모두 12개의 기둥을 세워 다섯 개의 통로를 만들었다. 베를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신고전주의 건축을 대표하는 초기 건축물이기도 하다.
1791년 8월 6일, 아직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문은 ‘평화의 문(Friedenstor)’으로 개방되었다. 이 이름은 이후 이 문이 겪게 될 역사를 생각하면 상당히 역설적이다.
평화를 가져오는 콰드리가
브란덴부르크 문의 모습을 완성한 것은 지붕 위에 올라선 거대한 조각상이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콰드리가(Quadriga)다. 조각가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Johann Gottfried Schadow)가 설계한 작품으로 1793년 완성되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와 승리의 여신으로 이루어진 브란덴부르크 문의 콰드리가
By Mike Peel,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오늘날 전차를 모는 인물은 흔히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조각 전체의 의미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의 부조에는 승리의 여신이 평화를 가져오는 행렬이 표현되어 있었고, 북쪽 문루의 전쟁신 마르스도 칼을 칼집에 다시 넣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음을 보여주는 상징 체계였다.
나폴레옹이 가져간 콰드리가
1806년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참패했고 프랑스군은 베를린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했고, 프랑스 측은 문 위의 콰드리가를 해체해 파리로 가져갔다. 평화를 상징했던 조각상이 승전국의 전리품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상황은 다시 뒤집혔다. 1814년 콰드리가는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때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Karl Friedrich Schinkel)이 디자인한 철십자와 프로이센 독수리가 여신의 지팡이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콰드리가에는 새로운 상징적 의미가 더해졌다. 처음에는 평화를 도시로 가져오는 존재였던 여신이 이제는 나폴레옹에게 승리한 프로이센을 상징하는 승리의 여신으로 재해석되었다. 조각은 돌아왔지만 그 의미는 달라졌다.
권력의 무대가 되다
19세기를 거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은 도시 출입문이라는 본래 기능을 잃어갔지만, 상징성은 오히려 더 커졌다. 특히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임명되자 그날 밤 나치와 우익 지지자들은 베를린 중심부에서 대규모 횃불 행진을 벌였다.

1939년 히틀러의 50세 생일을 기념한 브란덴부르크 문 군사 퍼레이드
By Bundesarchiv, Bild 102-00089, CC BY-SA 3.0 de, wikimedia commons.
브란덴부르크 문은 새로운 권력의 등장을 과시하고 군중을 동원하는 정치적 무대로 이용되었다. 평화를 상징했던 문이 다시 한번 정치 권력과 군중 동원의 배경으로 이용된 것이다. 그리고 12년 뒤 그 권력과 함께 베를린도 폐허가 된다.
전쟁이 남긴 상처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베를린은 연합군의 폭격과 시가전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역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주변 건물들이 폐허가 된 가운데 문 자체는 간신히 형태를 유지했지만, 위에 있던 콰드리가는 거의 파괴되었다.
전쟁 전의 원래 콰드리가는 1950년 철거되었고 대부분의 부품은 녹여졌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원래 콰드리가의 일부는 왼쪽 말의 머리 하나뿐이다. 현재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있는 콰드리가는 전후 복원 작업을 거쳐 1958년에 재건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브란덴부르크 문의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문은 세계를 양분한 새로운 대립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아무도 지나갈 수 없는 문
1945년 독일이 패망하면서 베를린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네 점령지역으로 나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소련 점령지역, 훗날의 동베를린에 속했다. 하지만 문 바로 서쪽은 영국군 관할지역으로 이어졌다. 즉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서 베를린의 경계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베를린 장벽에 가로막힌 브란덴부르크 문, 1988년 6월
By Bundesarchiv, CC BY-SA 3.0 de, wikimedia commons.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을 둘러싸는 장벽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이 위치가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서쪽을 지나갔고, 동독은 그 안쪽에도 추가 장벽과 철조망, 감시시설을 설치했다. 그 사이의 통제구역은 흔히 ‘죽음의 지대(Death Strip)’라고 불렸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베를린에 있었지만 동독 시민들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었고, 서베를린 사람들도 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그렇게 냉전과 독일 분단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냉전의 무대
분단된 베를린은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체제 경쟁을 상징하는 도시였다. 1963년 서베를린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쇠네베르크 시청(Rathaus Schöneberg)에서 유명한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24년 뒤인 1987년 6월 12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또 하나의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장벽 너머로 브란덴부르크 문이 보이는 자리에서 그는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말했다.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고르바초프 서기장, 이 장벽을 허무시오!)”
당시에는 상징적인 정치적 수사처럼 들렸던 이 말은 불과 2년 뒤 현실이 되었다.
1989년, 장벽이 무너지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의 여행 규정 발표에서 빚어진 혼란을 계기로 동베를린 시민들이 국경 검문소로 몰려들었고, 검문소들이 차례로 개방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사실상 무너졌다.
수천 명이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에도 몰려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기 쉬운 역사적 사실이 있다. 11월 9일 당일에 브란덴부르크 문이 곧바로 열린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른 검문소를 통해 사람들이 동서 베를린을 오가기 시작했지만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장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문이 실제로 다시 열린 것은 43일 뒤였다.
28년 만에 다시 열린 문

1989년 12월 22일 브란덴부르크 문 개방식.
(가운데 안경을 쓴 헬무트 콜과 그 왼쪽 끝에 당시 동독 각료회의 의장 한스 모드로)
By SSGT F. Lee Corkran,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1989년 12월 22일, 마침내 브란덴부르크 문 앞을 가로막았던 장벽에 보행자용 국경 통로가 다시 열렸다. 서독 총리 헬무트 콜과 동독 총리 한스 모드로를 비롯한 동서 베를린의 지도자들이 참석했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봤다. 1961년 장벽이 세워진 이후 28년 만이었다.
한때 아무도 지나갈 수 없었던 브란덴부르크 문을 사람들이 다시 걸어서 통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은 하나의 독일로 통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