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된 왕실의 정원, 아랑후에스(Aranjuez)

무기광장 쪽에서 바라본 아랑후에스 왕궁

아랑후에스 왕궁의 무기광장과 중앙 정면

By Ввласенко – Own work,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내려가면 타호강을 따라 자리 잡은 도시 아랑후에스(Aranjuez)가 나타난다. 오늘날 이 도시는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 협주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의 왕궁은 스페인 왕실이 봄마다 머물던 별궁이었다.

강과 정원이 둘러싼 왕궁

아랑후에스 왕궁의 역사는 16세기 펠리페 2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여러 국왕이 건물을 증축하고 주변을 정비하면서 아랑후에스는 스페인 왕실의 대표적인 별궁으로 자리 잡았다.

붉은 벽돌과 밝은 석재가 어우러진 왕궁은 화려한 규모로 사람을 압도하기보다 강과 정원 사이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랑후에스의 진정한 매력도 건물 내부보다는 왕궁을 둘러싼 넓은 녹지에서 드러난다.

호수처럼 잔잔한 타호강과 아랑후에스의 바르카스 다리

타호강을 가로지르는 아랑후에스의 바르카스 다리

By Ángel Serrano Sánchez de León, CC BY-SA 3.0, GFDL, wikimedia commons.

왕궁 옆으로는 타호강이 흐르고, 강물은 여러 수로를 따라 연못과 분수로 이어진다. 섬의 정원에는 나무 사이로 신화 속 인물을 형상화한 조각상과 분수가 자리하고, 왕자의 정원에는 긴 산책로와 연못, 정자와 작은 별궁이 흩어져 있다. 자연과 물, 건축물을 하나의 경관으로 엮어 놓은 공간이다.

아랑후에스 왕궁 섬의 정원에 있는 헤라클레스와 히드라 분수

아랑후에스 왕궁 섬의 정원에 있는 헤라클레스와 히드라 분수

By Javier Perez Montes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왕궁과 정원, 강과 수로, 주변 농경지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한 아랑후에스의 경관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건축물 하나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온 공간 전체가 ‘아랑후에스 문화경관’(Aranjuez Cultural Landscape)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시력을 잃은 작곡가가 그려 낸 정원

스페인의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Joaquín Rodrigo, 1901~1999)는 세 살 때 디프테리아를 앓은 뒤 시력을 거의 완전히 잃었다. 그러나 그가 음악으로 표현한 아랑후에스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생생하다.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에스파냐 공원에 세워진 호아킨 로드리고의 흉상. 뒤에는 그의 아내인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캄히의 모습이 보인다.

호아킨 로드리고의 흉상과 뒤편에 표현된 아내 빅토리아 캄히의 초상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에스파냐 공원)

By Mrexcel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1939년에 작곡된 《아랑후에스 협주곡》은 클래식 기타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이다. 로드리고는 이 곡을 통해 아랑후에스에 남아 있는 옛 시대의 분위기를 불러내고자 했다. 그는 작품에 정원의 목련 향기와 새들의 노래, 분수에서 솟아오르는 물소리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세 악장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은 2악장 아다지오다. 기타가 낮고 규칙적인 화음을 연주하면 잉글리시 호른이 길고 애절한 선율을 시작한다. 트럼펫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잉글리시 호른은 오보에보다 음역이 낮고 한층 어둡고 쓸쓸한 음색을 지닌 악기다.

기타가 그 선율을 이어받고 여러 관악기가 차례로 응답하면서 음악은 조용한 슬픔에서 격렬한 절정으로 치닫다가 다시 고요해진다. 그 선율 때문에 실제 아랑후에스도 밝은 햇빛 아래의 왕실 별궁보다 해 질 무렵의 고요한 정원처럼 기억되곤 한다.

그러나 협주곡 전체에 슬픔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1악장에는 스페인 민속무곡을 연상시키는 생기 있는 리듬이 흐르고, 3악장은 오래된 궁정무곡처럼 가볍고 우아하게 움직인다. 세 악장은 활기와 명상, 우아함이라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아랑후에스를 그려 낸다.

음악 속에 남은 아랑후에스

아랑후에스 왕궁의 왕의 정원

아랑후에스 왕궁에 딸린 왕의 정원(Jardín del Rey)

By Javier Perez Montes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아랑후에스 왕궁과 정원은 본래 국왕과 귀족을 위해 조성된 공간이었다. 왕실이 계절마다 이곳에 머물던 시대가 지나간 뒤에도 궁전과 분수, 나무가 늘어선 길은 그 자리에 남았다. 그리고 로드리고의 음악은 그곳의 분위기를 세계 곳곳으로 옮겨 놓았다.

아랑후에스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사람도 2악장의 첫 선율을 들으면 고요한 정원과 흐르는 물, 나무 사이로 멀어지는 옛 시대를 떠올릴 수 있다. 한 도시의 경관이 음악이 되고, 그 음악이 다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아랑후에스는 웅장한 왕궁만으로 기억되는 곳이 아니다. 강과 숲, 왕실의 역사와 한 작곡가의 선율이 겹쳐 있는 곳, 실제 모습을 만나기 전부터 음악을 통해 그 분위기를 상상하게 되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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