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읽는 사람, 플라뇌르(flâneur)

네덜란드 헤이그의 랑어 포르하우트에 세워진 테오 판 데르 나머르의 청동상 〈플라뇌르〉. ‘플라뇌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쓴 언론인 에뒤아르트 엘리아스를 기려 1968년 6월 13일 제막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랑어 포르하우트에 있는 조각상 〈플라뇌르〉

By Pvt pauline – Own work,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목적 없이 도시를 걷는 사람

도시를 걷는 데 반드시 목적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약속 장소로 가거나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거리가 이끄는 대로 걸을 수도 있다. 골목으로 접어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오래된 건물과 상점의 진열창 앞에서 걸음을 늦춘다. 이렇게 특별한 목적 없이 도시를 거닐며 그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하는 이를 프랑스어로 ‘플라뇌르(flâneur)’라고 한다.

Flâneur는 ‘어슬렁거리다’, ‘한가롭게 돌아다니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동사 flâner에서 나온 말이다. 19세기 파리에서 플라뇌르는 특별한 목적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빈둥거리거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라는 다소 가벼운 뜻으로 쓰였지만, 파리가 거대한 근대 도시로 변하면서 군중과 거리의 풍경을 관찰하는 새로운 도시형 인간을 뜻하게 되었다.

우리말로는 흔히 ‘산책자’ 또는 ‘도시 산책자’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플라뇌르는 평범한 산책객과는 조금 다르다. 그는 군중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에게 거리는 목적지로 가기 위해 지나치는 통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장면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군중 속에서 발견된 수수께끼

플라뇌르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의 단편 〈군중 속의 사람(The Man of the Crowd)〉이다. 184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의 무대는 런던이다.

병에서 회복 중인 화자는 카페 창가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옷차림과 표정, 몸짓을 살피며 그들의 직업과 생활을 짐작하던 그는 어느 순간 기묘한 인상의 노인을 발견하고 뒤를 쫓는다.

에드가 앨런 포우의 소설 "군중 속의 사람"에서 런던의 군중 속을 떠도는 노인을 뒤쫓는 화자의 이미지

런던의 군중 속을 떠도는 노인을 뒤쫓는 화자 (AI 생성 이미지)

노인은 번화가와 시장, 극장 주변과 빈민가를 밤새 돌아다닌다. 사람들이 흩어지면 불안해하고 새로운 인파를 발견하면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은 채 오직 군중 속에 머물기 위해 계속 움직인다. 다음 날까지 이어진 추적을 포기한 화자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그는 혼자 있기를 거부한다. 그는 군중 속의 사람이다.”
   “He refuses to be alone. He is the man of the crowd.”

화자는 끝내 노인의 정체도, 그가 거리를 떠도는 이유도 알아내지 못한다. 노인에게 군중은 떠날 수 없는 피난처인 반면, 화자에게는 관찰과 추론의 대상이다. 두 인물 모두 후대의 플라뇌르를 떠올리게 하지만, 어느 한쪽을 전형적인 플라뇌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특히 창가에서 행인들의 표정과 옷차림을 읽는 화자의 모습은 근대 도시 관찰자의 등장을 예고한다.

근대 도시의 관찰자

플라뇌르를 근대 도시의 상징적인 존재로 발전시킨 사람은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였다.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파리는 인구 증가와 상업의 발달, 대대적인 도시 개조를 겪으며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넓은 대로와 상점, 카페와 가스등이 도시의 풍경을 바꾸었고, 서로 이름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군중이 거리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보들레르는 1863년 발표한 《현대 생활의 화가(Le Peintre de la vie moderne)》에서 화가 콩스탕탱 기스(Constantin Guys, 1802~1892)를 군중 속에서 현대의 모습을 포착하는 관찰자로 그렸다. 그는 기스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완벽한 플라뇌르’를 언급하며, 군중 한가운데 머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끊임없이 변하는 도시를 관찰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스탕탱 기스의 〈베니티 페어(Vanity Fair)>

스탕탱 기스의 〈베니티 페어(Vanity Fair)〉, 1875~1885년경

By Constantin Guys,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플라뇌르는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표정과 몸짓, 의복과 유행을 관찰하고 그 순간들에서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혼자이면서도 군중과 함께 있고, 세상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다.

그러나 당시 거리를 한가롭게 거닐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자유는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필요했고, 여성이나 가난한 사람이 뚜렷한 목적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면 경계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초기의 플라뇌르가 주로 부르주아 남성이나 예술가의 모습으로 그려진 데에는 이러한 사회적 조건이 있었다.

아케이드와 상품 세계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보들레르의 작품과 플라뇌르를 통해 19세기 파리의 변화를 탐구했다. 그가 미완성 저작 《아케이드 프로젝트(Das Passagen-Werk)》에서 주목한 공간은 유리 지붕으로 덮인 파리의 파사주(passage), 즉 아케이드였다.

유리 지붕 아래 상점과 카페가 늘어선 파리의 파사주 데 파노라마(Passage des Panoramas). 1799년에 조성되어 1800년 문을 연 파리의 대표적인 초기 상업 파사주다.

유리 지붕 아래 상점과 카페가 늘어선 파리의 파사주

By Chabe01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상점과 카페가 들어선 아케이드의 진열창에는 각종 상품이 화려하게 전시되었다. 보행자는 비와 마차를 피하면서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거리인 동시에 건물 내부이기도 한 이곳은 도시 산책과 상품 구경이 결합되는 공간이었다.

플라뇌르는 물건을 반드시 사지는 않지만 진열창을 바라보며 걷는다. 상품은 사용하는 물건을 넘어 시선을 끌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된다. 그는 상품 세계에 매혹되는 구경꾼인 동시에 도시의 변화와 자본주의의 모습을 관찰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벤야민은 자전적 산문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Berliner Kindheit um neunzehnhundert)》에서 도시에서 길을 잃는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도시에서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숲속에서 길을 잃듯 도시에서 길을 잃으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Sich in einer Stadt nicht zurechtfinden heißt nicht viel. In einer Stadt sich aber zu verirren, wie man in einem Walde sich verirrt, braucht Schulung.”

이것은 플라뇌르를 직접 정의한 문장은 아니다. 다만 익숙한 도시를 새롭게 바라보려면 때로 정해진 길과 목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도시 산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길을 몰라 헤매는 것과 의식적으로 길을 잃는 것은 다르다. 익숙한 동선에서 벗어날 때 간판과 지붕, 상점과 골목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걷는다는 것은 도시를 다시 쓰는 일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사상가인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 1925~1986)는 《일상생활의 실천(L’Invention du quotidien)》에서 도시를 걷는 행위를 언어의 발화에 비유했다. 말하는 사람이 이미 존재하는 언어로 새로운 문장을 만들듯, 보행자는 이미 설계된 도시를 자기 방식으로 이용하며 새로운 경로를 만든다는 뜻이다.

도시계획가는 도로와 건물을 배치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계획된 길만 따르지 않는다. 골목을 지름길로 이용하고, 마음이 끌리는 장소에서 멈추며, 때로는 정해진 동선을 벗어난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사람마다 보고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걷는 사람은 어디로 갈지, 무엇을 바라볼지를 선택하면서 계획된 공간에 자신만의 경험과 이야기를 덧붙인다.

스마트폰 시대의 플라뇌르

오늘날에도 플라뇌르는 존재할까. 우리는 지도 앱이 알려주는 가장 빠른 경로를 따라 걷고, 주변 풍경보다 스마트폰 화면을 더 오래 바라보기도 한다. 이동은 편리해졌지만 우연히 낯선 골목에 들어가거나 이름 모를 가게 앞에서 멈추는 경험은 줄어들었다.

익선동 분위기를 반영한 플라뇌르 이미지

그렇다고 플라뇌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골목을 탐방하는 여행자, 도시의 일상을 기록하는 작가, 거리의 우연한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가도 현대의 플라뇌르가 될 수 있다. 반드시 파리에 살거나 지팡이를 들고 한가롭게 대로를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도 앱이 권하는 큰길에서 한 블록만 벗어나도 오래된 세탁소와 낮은 담장, 주인이 손으로 써 붙인 메뉴판처럼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도시가 나타난다. 평소 지나치던 거리에서 그런 낯선 표정 하나를 발견하는 순간, 출퇴근길도 새로운 도시 산책이 된다.

플라뇌르가 되려면 잠시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 목적지만 바라보는 대신 주변을 살피고, 사라져가는 것과 새로 생겨나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도시의 이야기는 유명한 건축물에만 남아 있지 않다. 오래된 간판과 문을 닫은 상점, 벽의 흔적과 사람들의 걸음에도 도시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빨리 통과하는 사람에게 거리는 이동 경로에 불과하지만, 천천히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수많은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플라뇌르는 단순히 목적 없이 걷는 사람이 아니다. 걷는 행위를 통해 익숙한 도시에서 낯선 장면을 발견하고, 그 안에 쌓인 시간과 삶의 흔적을 읽어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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