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기 자개 장식 캐비닛. 중앙아메리카 제작(마호가니·자개·거북등껍질·청동)
By Abujoy – Own work, CC BY 3.0, wikimedia commons.
추억 속의 자개장
한때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자개장이나 자개농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검은색 장롱 위로 꽃과 새, 산수 문양이 오색빛으로 반짝이던 가구들이다. 생활양식과 가구 취향이 바뀌면서 지금은 예전만큼 흔하게 볼 수 없지만, ‘자개’라는 이름은 여전히 익숙하다.
자개는 전복이나 일부 조개류의 껍데기 안쪽에 형성되는 무지갯빛 진주층(nacre)을 말한다. 영어로는 nacre 또는 mother-of-pearl이라고 한다. 공예에서는 이 부분을 얇게 갈고 잘라 장식재로 사용한다.
우리가 자개장에서 보았던 그 오묘한 빛은 인공적으로 색을 입힌 것이 아니라 바닷속 생물이 만들어낸 자연의 빛인 셈이다.
자개의 형성 과정
조개껍데기는 단순한 돌덩어리가 아니다. 연체동물은 외투막(mantle)이라는 조직에서 탄산칼슘과 단백질, 다당류 등의 물질을 분비해 껍데기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유기물로 이루어진 구조가 일종의 틀 역할을 하고, 그 위에서 탄산칼슘 결정의 생성과 성장이 조절된다. 생물이 무기물을 이용해 뼈나 치아, 조개껍데기처럼 정교한 구조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생체광물화(biomineralization)라고 한다.

조개껍데기 안쪽에 형성된 무지갯빛 자개층
By Valenzuela400,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자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일부 연체동물의 껍데기 안쪽에 층층이 형성된다. 그런데 자개의 성질을 이해하려면 성분뿐 아니라 그 배열 방식도 봐야 한다.
자개의 주성분, 탄산칼슘
자개의 주성분은 아라고나이트(aragonite)다. 아라고나이트는 탄산칼슘(CaCO₃)의 결정 형태 가운데 하나다. 대표적으로 자개는 중량의 약 95%가 아라고나이트이고, 나머지 약 5%가 단백질과 다당류 같은 유기물로 이루어져 있다. 종에 따라 구성 비율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탄산칼슘 자체는 특별히 질긴 물질이 아니다. 아라고나이트 자체는 단단하지만 비교적 취성이 커, 균열의 진행을 막는 능력이 뛰어난 재료는 아니다.
조개는 이 평범한 재료를 독특한 방법으로 배열한다. 아라고나이트 결정을 아주 얇은 판 모양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얇은 유기물층을 넣어 수많은 층을 쌓는다.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면 단단한 아라고나이트 판들이 벽돌처럼 엇갈려 놓여 있고 그 사이를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유기물이 연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재료과학에서는 자개의 구조를 흔히 ‘벽돌과 모르타르(brick-and-mortar)’ 구조라고 부른다. 아라고나이트가 벽돌이라면 유기물층은 벽돌 사이의 모르타르인 셈이다.
단단함과 질김의 차이
단단한 물질이라고 해서 반드시 잘 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리는 표면이 단단하지만 균열이 생기면 그 균열이 빠르게 퍼져 깨질 수 있다. 재료에 균열이 생겼을 때 그것이 성장해 결국 파괴되는 것에 저항하는 능력을 파괴인성(fracture toughness)이라고 한다.
자개의 미세구조는 바로 이 균열의 진행을 어렵게 만든다. 균열이 발생해도 아라고나이트 판과 유기물층이 반복되는 복잡한 구조 때문에 곧장 앞으로 뻗어나가기 어렵다. 균열의 방향이 꺾이기도 하고, 아라고나이트 판들이 서로 미끄러지거나 뽑혀 나오기도 하며, 유기물층도 변형된다. 이 과정 하나하나에 에너지가 필요하다.
결국 균열이 자개를 가로질러 진행하려면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면서 계속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그래서 자개는 구성 성분인 아라고나이트만으로 이루어진 물질보다 훨씬 높은 파괴 저항성을 나타낼 수 있다. 자개의 뛰어난 기계적 성질은 결국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보다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개의 무지갯빛이 만들어지는 원리

무지갯빛을 띠는 자개를 둥글게 연마한 카보숑. 주성분은 아라고나이트
By James St. John, CC BY 2.0, wikimedia commons.
자개의 또 다른 특징은 보는 방향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오묘한 무지갯빛이다. 이 색은 페인트처럼 색소를 칠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자개 내부에는 매우 얇은 아라고나이트 판들이 여러 층으로 배열되어 있다. 빛이 이 미세한 층들에서 반사되면서 서로 간섭하고, 판의 두께와 배열, 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바라보는 각도 등에 따라 특정 파장의 빛이 강해지거나 약해진다.
그래서 같은 자개라도 보는 방향에 따라 푸른색이나 녹색, 분홍색 등 서로 다른 색으로 빛나 보인다. 이처럼 물질에 포함된 색소가 아니라 미세한 구조와 빛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는 색을 구조색(structural color)이라고 한다.
비눗방울이나 공작새 깃털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색도 구조색의 대표적인 사례다. 만들어지는 세부적인 원리는 서로 다르지만, 미세구조와 빛의 상호작용이 색을 만들어낸다는 점은 같다.
자개와 나전칠기의 차이
자개와 나전칠기는 흔히 같은 뜻처럼 사용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 자개는 재료이고, 나전은 그 재료를 이용해 장식하는 기법이다.
전복이나 조개껍데기의 진주층을 얇게 갈아 여러 형태로 자른 뒤, 자개 조각을 기물 표면에 붙여 문양을 만드는 기법을 나전이라 한다. 여기에 옻나무의 천연 수액인 옻을 여러 차례 덧발라 깊은 칠흑색과 견고한 표면을 만들어낸 것이 나전칠기다.

19세기 자개 장식 팔각나전함
By Grampus – Own work,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나전칠기가 크게 발달했다. 작은 자개 조각을 정교하게 잘라 꽃이나 덩굴 같은 복잡한 문양을 표현했으며, 이후 오랫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공예기법 가운데 하나로 이어졌다.
우리가 익숙하게 기억하는 자개장도 이러한 나전 공예의 전통이 가구에 적용된 것이다.
과학자들이 자개를 연구하는 이유
오늘날 자개는 전통공예의 재료인 동시에 재료과학자들이 주목하는 자연의 복합재료이기도 하다. 단단한 무기물과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유기물을 정교하게 배열해 각각의 재료만으로는 얻기 어려운 높은 파괴 저항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이러한 원리를 모방해 균열이 쉽게 퍼지지 않는 유리와 세라믹, 각종 복합재료를 개발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자개의 미세구조를 본뜬 일종의 생체모방(biomimetic) 소재다.
아직 이런 자개 모방 소재가 스마트폰 유리 등을 광범위하게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개가 보여준 구조적 원리는 새로운 소재를 설계하는 데 계속 활용되고 있다. 한때 우리 집 안방을 차지했던 자개장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재료과학이 숨어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