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의 휴일》(1953) 홍보 사진 속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
By Paramount Pictures,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로마의 휴일》과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배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은 십 대 시절을 나치 점령 아래의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당시 무용을 배우던 그녀는 훗날 비밀 공연을 열어 저항운동을 위한 기금을 모았다고 회고했다.
헵번이 지하신문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연합군 비행사들을 도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자료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므로 그녀의 회고와 전기 및 관련 자료 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립국이라 믿고 찾아간 곳
벨기에에서 태어난 헵번은 어린 시절을 영국에서 보냈다. 1939년 어머니는 헵번을 데리고 외가가 있는 고향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어머니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는 네덜란드가 중립을 유지해 전쟁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1940년 독일군이 침공하면서 네덜란드도 독일군에 점령당했다.
가족의 정치적 배경은 복잡했다.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도 한때 나치에 호의적이었다. 로버트 매트젠(Robert Matzen)의 전기 《Dutch Girl: Audrey Hepburn and World War II》(2019)는 부모의 친나치 성향과 함께, 헵번이 전쟁과 점령을 겪으며 성장한 과정을 다루고 있다.

뉴욕 자비츠 센터에서 열린 북엑스포에서 《Dutch Girl》을 들고 있는 로버트 매트젠.
By Rhododendrites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1942년에는 이모부 오토 판 림뷔르흐 스티륌(Otto van Limburg Stirum, 1893–1942)이 처형되었다. 그는 저항세력의 파괴공작에 대한 보복으로 살해된 인질이었다. 해당 공작에 직접 가담한 것은 아니었으며, 네덜란드 사회의 유력 인사라는 이유로 표적이 되었다. 처형일은 8월 15일이었다.
이 사건은 헵번과 어머니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매트젠은 이를 어머니가 나치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로 설명한다. 이후 헵번과 어머니는 아른험 인근의 벨프(Velp)로 옮겨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비밀 공연으로 모은 돈
점령기의 네덜란드에서는 개인 주택에 사람들을 초대해 비밀 공연을 여는 일이 있었다. ‘검은 저녁들’을 뜻하는 즈바르터 아본던(zwarte avonden)이라 불린 모임이었다. 매트젠에 따르면, 이 공연들은 유대인을 비롯한 은신자들과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기금을 마련하는 데 쓰였다.
헵번은 자신도 이런 공연에 참여했다고 회고했다. 친구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어머니가 의상을 만들었으며, 그녀는 직접 구성한 춤을 선보였다. 공연은 밖에서 알아채지 못하도록 철저히 창문을 가린 집 안에서 진행되었으며, 밖에서는 독일군이 다가오는지 망을 보았다.
헵번의 무용 공연에 관한 이야기는 뒤늦게 등장한 전기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로마의 휴일》 출연을 위한 스크린 테스트에서도 그녀는 전쟁 중 비밀 장소에서 춤을 추며 저항운동을 위한 돈을 모았다고 이야기했다. 이는 그녀가 배우로 유명해지기 전부터 자신의 경험으로 설명해 온 내용이다.
음식과 메시지를 전했다는 회고
매트젠은 헵번이 지역 의사이자 저항운동 지도자였던 헨드리크 비서르트 호프트(Hendrik Visser ’t Hooft)를 도왔다고 서술한다. 그의 전기에는 지하신문을 배달하고, 숨어 있던 연합군 비행사들에게 음식과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비행사 지원에 관해서도 헵번 자신의 비교적 이른 증언이 있다. 매트젠이 소개한 1951년 신문 인터뷰에서 그녀는 비행사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의료 봉사에 관한 증언도 있다. 매트젠은 당시 벨프에서 헵번을 알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했으며, 그중에는 1944년 말 어머니를 잃은 자신을 병원 자원봉사자였던 헵번이 위로해 주었다는 증언이 포함되어 있다.

오드리 헵번이 살았던 스위스 톨로슈나에 세워진 그녀의 기념비
By Urs.Schmid007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기록을 둘러싼 논쟁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헵번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설명이 엇갈린다. 네덜란드 에어본 박물관은 2016년 조사에서 그녀의 저항활동을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비밀 전달과 아른험 전투 이후 영국군 탈출 지원 등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했지만 관련 문서와 증언에서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2019년에 출간된 매트젠의 전기는 헵번의 회고와 새로운 인터뷰, 전시 일기,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그녀가 저항운동을 도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헵번이 직접 이야기한 비밀 무용 공연과 비행사들에게 음식을 전달한 일에 더해, 연락원 활동과 지역 저항조직과의 관계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다만 매트젠도 일부 일화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 영국군 비행사와 헵번 가족의 만남을 다룬 전후 신문 기사와 관련해서는 시기와 장소 등의 모순을 지적하고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