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와 미국 알래스카 사이의 베링해협
By NormanEinstein,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동쪽 끝, 미완의 지도
18세기 초, 러시아는 이미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가진 지도에서 시베리아 동쪽 바다는 여전히 불확실한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 사이에 바다가 있다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의 생전 초상화
By Карел де Моор,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1672~1725)는 바로 그 미지의 공간에 주목했다.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바꾸려 했던 그는 서쪽으로는 발트해(Baltic Sea)를 향했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동쪽 끝이 어떤 세계와 맞닿아 있는지도 확인하려 했다.
그가 덴마크 출신의 항해사 비투스 베링(Vitus Bering, 1681~1741)을 동쪽으로 보낸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도에 남은 빈 공간을 확인하는 일은 새로운 항로와 교역 가능성을 찾는 일이었다. 탐험의 결과는 장차 러시아가 북태평양에서 영토와 영향력을 확대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었다.
황제가 남긴 명령
표트르 대제는 1725년 1월,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베링에게 캄차카반도(Kamchatka Peninsula)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곳에서 배를 건조한 뒤 북쪽으로 항해하여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육지로 이어져 있는지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지도에서 베링해협(Bering Strait)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캄차카까지 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대탐험이었다. 베링 일행은 유럽 러시아를 출발해 도로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베리아를 횡단해야 했다. 식량과 각종 장비는 물론,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물자까지 육로와 강을 통해 운반해야 했다. 바다를 탐험하기에 앞서 광대한 대륙부터 통과해야 했던 것이다.

1648년 세묜 데즈뇨프 탐험대의 항해를 묘사한 그림
By Klavdy Lebedev,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사실 러시아 탐험가 세묜 데즈뇨프(Semyon Dezhnyov, 약 1605~1673)는 1648년 베링보다 약 80년 앞서 아시아와 북아메리카 사이의 해협을 통과했다. 그는 콜리마강 하구에서 북극해로 나아간 뒤 축치반도의 북동쪽 끝을 돌아 오늘날의 베링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데즈뇨프는 자신이 통과한 해협을 체계적으로 측량하거나 지도에 남기지 못했다. 항해 보고서도 정부 문서 속에 묻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발견은 표트르 대제의 탐험 계획에 활용되지 못했다. 러시아 정부의 관점에서 동쪽 바다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었다.
해협을 통과했지만 대륙은 보지 못했다
베링은 1728년 캄차카에서 건조한 성 가브리엘호(St. Gabriel)를 타고 북쪽으로 항해했다. 그는 오늘날 베링해협이라고 부르는 바다를 지나 북극해(Arctic Ocean) 쪽으로 올라갔다.
아시아 북동쪽 해안선이 서쪽으로 꺾이는 것을 확인한 베링은 두 대륙이 육지로 이어져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짙은 안개 때문에 북아메리카 해안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의 항해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에 바다가 있다는 강력한 근거를 제시했지만 두 대륙의 분리를 완전히 입증하지는 못했다.
첫 번째 캄차카 탐험은 해협의 존재를 짐작하게 했지만, 바다 건너의 지리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러나 그가 시작한 탐험 계획은 중단되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는 1733년 훨씬 더 큰 규모의 대북방 탐험(Great Northern Expedition)을 출범시켰다. 두 번째 캄차카 탐험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업은 시베리아와 북극해 연안을 측량하고, 북태평양을 건너 북아메리카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는 국가적 탐사였다.
베링과 러시아 해군 장교 알렉세이 치리코프(Alexei Chirikov, 1703~1748)가 북아메리카 탐사를 맡았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알래스카
1741년 6월, 베링과 치리코프는 성 베드로호(St. Peter)와 성 바울호(St. Paul)를 이끌고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Petropavlovsk-Kamchatsky)를 출발했다. 두 배는 북태평양을 건너던 중 짙은 안개 속에서 서로 헤어졌다. 이후 베링과 치리코프는 각자 다른 항로로 북아메리카를 향했다.

1741년 베링과 치리코프가 이끈 대북방 탐험대의 알래스카 항해 경로
By Vitus Bering, Aleksei Chirikov,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치리코프의 성 바울호는 알래스카(Alaska) 남동부 해안에 도달했다. 베링의 성 베드로호도 세인트일라이어스산(Mount Saint Elias)을 확인한 뒤 카약섬(Kayak Island)에 상륙했다.
그러나 귀환길은 참혹했다. 추위와 폭풍, 식량 부족과 괴혈병이 선원들을 덮쳤다. 성 베드로호는 캄차카 앞바다의 코만도르스키예 제도(Commander Islands)에 속한 한 섬에 표착했다. 베링은 그곳에서 극심한 쇠약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1741년 12월 숨졌다. 그 섬은 훗날 베링섬(Bering Island)으로 불리게 되었다.
탐험대는 많은 사람을 잃었지만 빈손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선원들은 베링섬 일대에서 얻은 해달 가죽을 가지고 캄차카로 귀환했다. 이 가죽이 중국 시장에서 비싼 값에 거래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러시아의 사냥꾼과 상인들이 북태평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리적 탐험이 본격적인 모피 교역으로 이어진 것이다.
탐험은 식민지 건설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모피 사냥꾼과 상인들은 알류샨열도를 따라 점차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의 목표는 중국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리는 해달 가죽이었다.
1784년 상인이자 탐험가인 그리고리 셸리호프(Grigory Shelikhov, 1747~1795)는 코디액섬(Kodiak Island)의 스리세인츠만(Three Saints Bay)에 항구적인 러시아 거점을 세웠다. 이는 알래스카에 건설된 최초의 영구적인 러시아 정착지였다.
1799년에는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가 설립되었다. 황실로부터 모피 교역과 식민지 경영에 관한 독점권을 부여받은 이 회사는 러시아령 아메리카를 사실상 통치했다.
식민지의 중심지는 처음에는 코디액이었지만, 1808년 오늘날의 싯카(Sitka)인 노보아르한겔스크(Novo-Arkhangelsk)로 옮겨졌다. 싯카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행정과 모피 교역을 이끄는 중심지가 되었다.

1860년 지도. 옅은 청록색으로 표시된 러시아령 아메리카(알래스카)와 영국령 아메리카(캐나다)
By Flux.books at en.wikipedia,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그러나 이 과정을 탐험과 개척이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러시아인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알래스카에는 여러 원주민 공동체가 살아가고 있었다. 우난간(Unangan, 흔히 알류트족), 알루티크족(Alutiiq), 틀링깃족(Tlingit)을 비롯한 원주민들은 북태평양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독자적인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러시아 상인들은 원주민의 뛰어난 항해술과 사냥 기술에 크게 의존했다. 동시에 인질과 폭력을 동원하여 해달 사냥을 강요하기도 했다. 외부에서 유입된 질병과 가혹한 노동, 러시아인과의 무력 충돌은 원주민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러시아령 알래스카의 역사는 미지의 바다를 탐사한 항해의 역사인 동시에, 모피를 차지하려는 제국과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충돌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왜 알래스카를 팔았을까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차지했지만 이곳을 안정적으로 경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수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러시아인 정착자의 수도 많지 않았다. 식민지 경제를 떠받치던 해달은 지나친 포획으로 크게 줄었으며, 먼 식민지를 유지하고 방어하는 데 드는 비용도 부담이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이어진 크림전쟁(Crimean War)에서 패배한 뒤 러시아의 재정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다음 전쟁이 일어나면 알래스카를 영국에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주요 경쟁국이었고, 알래스카 동쪽의 캐나다를 지배하고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방어하기 어려운 땅을 전쟁으로 잃기보다 미국에 팔아 자금을 확보하는 편이 현실적이었다.

1867년 알래스카 양도조약 서명 장면. 왼쪽부터 로버트 S. 츄, 윌리엄 H. 수어드,
윌리엄 헌터, 보디스코, 에두아르드 드 스테클, 찰스 섬너, 프레더릭 W. 수어드
By Emanuel Leutze,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1867년 3월 30일,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William H. Seward, 1801~1872)와 주미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드 드 스테클(Eduard de Stoeckl, 1804~1892)은 알래스카 매매조약에 서명했다. 매매 가격은 720만 달러였다.
미국 내에서는 매입의 가치를 두고 기대와 회의가 엇갈렸다. 반대자들은 얼음과 바위뿐인 쓸모없는 땅을 샀다며 이를 ‘수어드의 바보짓(Seward’s Folly)’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조약은 같은 해 4월 9일 미국 상원에서 37대 2로 승인되었다. 북태평양 진출이라는 알래스카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했던 것이다.
1867년 10월 18일 싯카에서 영토 인계식이 열리면서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미국령 알래스카가 되었다. 러시아가 북아메리카에서 펼쳤던 약 1세기 동안의 식민지 경영도 막을 내렸다.
표트르의 명령이 바꾼 지도
표트르 대제가 베링에게 내린 명령은 짧았지만 그 결과는 한 세기를 훌쩍 넘어 이어졌다. 베링은 첫 항해에서 북아메리카를 보지 못했고, 두 번째 항해에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자신이 도달한 땅이 러시아의 식민지로 변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항해는 시베리아의 끝과 북아메리카의 시작을 하나의 지리적 공간으로 연결했다. 그가 지나간 바다를 따라 모피 사냥꾼과 상인, 군인과 선교사가 움직였다. 러시아는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마침내 그 땅을 미국에 넘겼다.
오늘날 러시아와 미국은 베링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국제정치에서는 멀리 떨어진 두 강대국처럼 보이지만, 지도 위에서는 좁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다.
표트르 대제가 알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 바다 너머의 세계였다. 러시아의 동쪽 끝에는 무엇이 있으며, 그 너머의 땅은 러시아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될 것인가. 그 물음에서 시작된 항해는 베링의 목숨을 앗아갔고, 러시아령 알래스카를 탄생시켰으며, 훗날 북태평양의 정치적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