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의에서 새로운 계획이 제안된다. 설명은 설득력 있고 참석자들도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실행만 하면 될 것 같은 순간, 누군가 말을 꺼낸다.
“잠깐, 반대쪽 입장에서 생각해 보죠. 우리가 예상한 대로 고객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어에서는 이런 역할을 맡는 사람을 devil’s advocate, 즉 ‘악마의 대변인’이라고 부른다. 이름만 들으면 악한 일을 옹호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논의를 깊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뜻한다.
‘악마의 대변인’이라고 불린 이유
가톨릭교회에서 시복(諡福, beatification)은 후보자를 복자로, 시성(諡聖, canonization)은 성인으로 공식 인정하는 절차다. 한 사람을 신앙의 모범으로 인정하는 일이므로 그를 높이 평가하는 증언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후보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제출한 증거는 충분한가? 증언에 모순은 없는가? 후보자에게 불리한 자료가 누락되지는 않았는가? 이런 문제를 따져 보는 역할이 필요했다.
이 업무를 맡은 사람의 공식 직함은 라틴어로 promotor fidei(신앙 검찰관)이었다. 그는 후보자의 덕행과 기적으로 제시된 증거를 검토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기적이라고 주장된 사건에 자연적인 설명이 가능한지, 훌륭한 행동으로 평가된 일에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 등을 따지는 것도 그의 업무였다.
후보자의 시복·시성에 반대되는 논거를 제시하는 역할 때문에 그는 통칭으로 advocatus diaboli, 곧 ‘악마의 대변인’이라고 불렸다. 이는 공식 직함이 아니라 업무의 성격에서 나온 별칭이었다. 이런 반대 검토 역할은 적어도 16세기 초의 시성 절차에서 확인되며, 이후 교회의 심사 제도 안에서 정비되었다.
이름과 실제 목적 사이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있다. 후보자에게 불리한 논거를 제시하는 모습 때문에 ‘악마의 대변인’이라고 불렸지만, 그 역할의 목적은 교회의 판단을 신중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후보자를 지지하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일 역시 신앙을 지키는 업무였던 셈이다.
이 제도가 옛 모습 그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의 시성 절차 개편으로 해당 직책의 업무도 재편되었다. 다만 직책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개편된 규정에도 신학자 회의를 주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등의 역할이 명시되어 있다.
일부러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
오늘날 devil’s advocate는 종교적 맥락을 벗어나 일상적인 토론과 회의에서도 쓰인다. 핵심은 자신이 믿는 의견과 토론을 위해 취하는 입장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데 있다.
어떤 계획에 대체로 찬성하더라도 그 전제와 근거를 점검하려고 반대 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상대방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관점을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주장을 잠시 펼칠 수도 있다. 현대 영어에서 이 표현은 이런 역할을 가리킨다. 흔히 쓰이는 표현은 play devil’s advocate다.
Let me play devil’s advocate for a moment.
(잠깐 반대쪽 입장에서 이야기해 볼게요.)
여기서 play는 어떤 역할을 맡는다는 뜻이다. 이 말을 먼저 꺼내면 이어서 제시할 반론이 자신의 최종 의견이라기보다 검토를 위한 발언임을 알릴 수 있다.
기업의 레드팀과 닮은 기능
이런 역할은 현대 기업과 조직에서 활용하는 레드팀(red team)과도 기능적으로 닮아 있다. 레드팀은 조직의 계획과 아이디어, 그 바탕이 되는 가정을 엄격하게 분석하고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구성되는 팀이다. 이러한 활동을 레드티밍(red teaming)이라고 한다. 독립적인 관점에서 기존 판단을 검토하고,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보완하는 데 목적이 있다.
기업의 신제품 출시를 가정해 보자. 담당 부서는 시장 조사와 판매 전망을 바탕으로 성공 가능성을 설명한다. 이때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맡은 참석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설문 조사에서 구매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실제로도 이 가격에 제품을 살까요?”
레드팀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이 질문을 구체적인 검증 활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고객이 예상보다 적게 구매하는 상황, 경쟁사가 가격을 낮추는 상황, 제품의 약점이 공개되는 상황 등을 설정하고, 그런 조건에서도 출시 전략이 유효한지 살펴보는 것이다.
‘악마의 대변인’이 토론에서 맡는 역할을 강조한다면, 레드팀은 조직적인 검증 활동을 강조한다. 레드팀의 활동에는 반론 제시뿐 아니라 자료 분석, 실패 시나리오 검토, 모의 공격이나 시험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건설적인 반론의 조건
‘악마의 대변인’의 가치는 합의 과정에서 빠진 질문을 제기하는 데 있다. 유용한 반론은 어떤 가정이 불확실한지, 어떤 증거가 부족한지, 어떤 상황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짚는다. 이때 상대를 무안하게 하기보다 함께 검토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며, 조직도 불편한 질문을 비협조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반론을 검토한 뒤에도 계획이 설득력을 유지한다면 실행할 근거가 더 분명해지고, 약점이 드러난다면 실행 전에 수정할 기회를 얻는다. 의도적인 반대가 더 나은 판단으로 이어지려면 반론을 제시하는 역할과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함께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