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By J.Z. Wood,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효모가 바꾼 맥주의 역사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라거(Lager)’와 ‘에일(Ale)’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라거와 에일을 단순히 맛이 다른 맥주 정도로 생각하지만, 두 맥주의 가장 큰 차이는 사용하는 효모와 발효 방식에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맥주는 라거지만 인류가 처음부터 라거를 마신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에일만 만들어 마셨고, 라거는 중세 말 유럽에서 새로운 양조 방식이 발전하면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라거는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인류가 처음 마신 맥주, 에일
맥주의 역사는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이후 중세 유럽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만들어 마신 맥주는 대부분 에일이었다.
에일은 사카로미세스 세레비시아(Saccharomyces cerevisiae)라는 효모를 사용한다. 이 효모는 약 18~22℃의 비교적 따뜻한 온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발효가 진행되는 동안 액체 위쪽으로 떠오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이를 상면발효(Top Fermentation)라고 부른다.
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에는 따뜻한 환경에서도 쉽게 발효되는 이 효모가 가장 적합했기 때문에 에일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널리 양조되던 맥주였다.
독일의 겨울이 만든 새로운 맥주, 라거

쾰른의 대표 맥주 쾰쉬(Kölsch): 가펠 맥주와 쾰른 대성당
By Privatbrauerei Gaffel Becker & Co, CC BY-SA 3.0 de, wikimedia commons.
중세 말 독일, 특히 바이에른 지역에서는 여름철 높은 기온 때문에 맥주가 쉽게 변질되는 일이 잦았다. 이 때문에 겨울철에만 맥주를 양조하고, 완성된 맥주를 차가운 동굴이나 저장고에서 오랫동안 숙성시키는 방법이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추운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새로운 효모가 등장했다. 바로 사카로미세스 파스토리아누스(Saccharomyces pastorianus)이다.
이 효모는 약 7~13℃의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발효하며, 발효가 끝나면 효모가 용기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하면발효(Bottom Fermentation)라고 한다.
‘라거(Lager)’라는 이름도 독일어 라게른(lagern, 저장하다)에서 유래했다. 즉, 오랫동안 차갑게 저장하고 숙성하는 양조 방식이 이름의 기원이 된 것이다.
라거 효모는 자연이 만든 ‘하이브리드’
오늘날 라거를 만드는 사카로미세스 파스토리아누스(Saccharomyces pastorianus)는 원래부터 존재하던 효모가 아니다. 유전자 분석 결과, 이 효모는 기존의 사카로미세스 세레비시아(Saccharomyces cerevisiae)와 사카로미세스 에우바야누스(Saccharomyces eubayanus)가 자연적으로 교배되어 탄생한 하이브리드 효모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랫동안 사카로미세스 에우바야누스는 남미나 아시아 등 유럽 밖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에는 아일랜드 토양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라거 효모의 기원이 유럽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연구 결과로 평가된다.
라거와 에일은 무엇이 다를까?
라거와 에일의 차이는 단순히 맛만이 아니다. 에일은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빠르게 발효하기 때문에 과일 향이나 꽃 향처럼 다양한 향을 만들어 내며, 맥주의 개성이 강한 편이다.
반면 라거는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발효하고 오랫동안 숙성하기 때문에 향은 상대적으로 절제되어 있지만, 맛이 깔끔하고 청량하며 균일하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대량 생산에도 적합해 오늘날 가장 널리 보급된 맥주가 되었다.
우리가 마시는 맥주의 대부분은 라거
오늘날 세계에서 판매되는 맥주의 대부분은 라거다. 조사 기관에 따라 비율에는 차이가 있지만, 전체 시장의 약 75~9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될 만큼 라거는 현대 맥주 시장을 대표하는 스타일이 되었다.
우리가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쉽게 만나는 버드와이저, 하이네켄, 칼스버그, 코로나, 아사히 슈퍼드라이, 삿포로, 카스, 테라 등도 모두 라거 계열의 맥주다.
라거가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이유는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깔끔한 맛과 안정적인 품질 때문이다. 저온 발효와 숙성을 거친 라거는 맛의 편차가 적고 대량 생산에도 적합해 산업화 시대 이후 세계 맥주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다.

프랑커르스하우젠-베르카탈의 외크스(ÖX) 펍에서 판매하는 야코비누스 바이젠
By Nemracc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반면 에일은 과일 향과 꽃 향, 진한 홉 향 등 개성이 뚜렷한 풍미를 지닌 경우가 많다. 특히 IPA, 스타우트, 포터, 페일 에일, 바이젠(독일식 밀맥주) 등 다양한 스타일은 저마다 독특한 향과 맛을 지니고 있어 최근 수제맥주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흑맥주의 대명사인 기네스도 스타우트 스타일의 에일 맥주다. 따라서 오늘날의 맥주 문화는 대중성을 갖춘 라거와 개성 넘치는 에일이 함께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무리하며
맥주 한 잔에는 수백 년에 걸친 양조 기술의 변화와 효모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인류가 오랫동안 마셔 온 에일, 그리고 중세 유럽의 추운 겨울과 저온 저장 방식 속에서 발전한 라거는 맥주의 역사가 효모와 발효 방식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마시는 맥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양조 환경과 미생물이 함께 만들어 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