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해–발트해 운하의 경로, 빨간색이 1931~1933년에 건설된 벨로모르 운하 구간
(파란색은 기존의 강과 호수를 이용해 발트해로 이어지는 수로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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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8월, 소련 북서부에서 백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새로운 운하가 공식 개통되었다. 백해–발트해 운하(Беломорско-Балтийский канал), 흔히 벨로모르 운하 (Беломорканал)라고 불리는 이 수로는 스탈린 시대의 대규모 건설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소련 당국은 운하의 완공을 사회주의 건설의 위대한 성과로 선전했다. 그러나 이 운하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 규모나 공학적 성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건설에 동원된 노동력의 대부분이 강제수용소의 수감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벨로모르 운하는 단순한 교통시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가 수감자들을 대규모 건설사업에 동원하고, 노동을 통해 이들을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던 실험장이었다. 이 사업에는 경제적 목적과 정치적 목적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운하를 건설하는 일과 인간을 개조하는 일이 하나의 과제로 결합된 것이다.
기계 대신 인간을 동원하다
1920년대 말 소련은 급속한 산업화에 착수했다. 1928년에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은 공업 생산의 확대와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목표로 했다. 공장과 발전소, 철도와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과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산업화에 필요한 기계와 숙련된 기술자, 자본이 모두 부족한 상태였다.
백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려는 구상은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존재했다. 이 수로가 완성되면 북부의 백해에서 내륙의 호수와 강을 거쳐 발트해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전략적 가치가 기대되었다. 문제는 험난한 자연환경과 막대한 공사비였다.

벨로모르 운하 건설 당시의 공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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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가 지나갈 지역은 숲과 호수, 늪지대,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지형에 수로를 건설하려면 대규모 굴착과 발파 작업, 수문과 제방 건설이 필요했다. 정상적인 토목공사라면 상당한 기계장비와 오랜 공사 기간이 요구되는 사업이었다.

벨로모르 운하 건설에 동원된 수감자들의 노동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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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련 지도부는 기계보다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공사는 국가정치보안부(OGPU)에 맡겨졌고, 수감자들이 주요 노동력으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삽과 곡괭이, 손수레 같은 단순한 도구를 사용해 땅을 파고 암석을 깨뜨렸다. 중장비의 부족을 대규모 인력 동원으로 보충하려 한 것이다.
1931년에 시작된 벨로모르 운하 건설은 1933년까지 약 20개월 만에 마무리되었다. 운하는 오네가호(Онежское озеро) 북쪽의 포베네츠(Повенец)에서 백해 연안의 벨로모르스크(Беломорск)까지 이어졌다. 기존의 호수와 하천을 활용하면서 약 37킬로미터의 인공수로를 새로 굴착하고 수문과 댐 등을 건설해 연결한 것으로, 전체 길이는 약 227킬로미터였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대규모 수로를 완성했다는 사실은 소련 당국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공사를 서두르는 과정에서 수감자들은 혹독한 기후와 열악한 생활환경, 식량 부족과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건설 기간인 1931년부터 1933년까지 12,318명의 수감자가 사망했다. 특히 공사 막바지인 1933년에만 8,870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실제 희생자 규모는 이보다 컸을 가능성이 있으며, 정확한 숫자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더욱이 완공된 운하는 당초 기대했던 만큼의 경제적 효용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건설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수로의 깊이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아 대형 선박의 통행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막대한 인력을 투입해 거둔 성과는 선전에서 묘사된 것만큼 완전하지 않았다. 완공된 운하를 시찰한 스탈린조차 수로가 지나치게 얕고 좁다며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감자들 사이에 만들어진 위계질서
벨로모르 운하 건설을 담당한 OGPU는 단순히 수감자들을 한곳에 모아 노동을 강요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을 적은 수의 관리 인력으로 통제하기 위해 수감자들 사이에 차별적인 지위와 권한을 부여했다.

백해–발트해 운하 건설을 책임졌던 OGPU 간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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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은 모두 같은 처지에 놓여 있지 않았다. 일반 형사범과 정치범은 서로 다르게 취급되었으며, 특히 계급적 출신은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절도범이나 강도 같은 일반 형사범은 사회질서를 위반한 사람들이었지만, 반드시 소비에트 체제 자체에 적대적인 존재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반면 반혁명 범죄를 규정한 형법 제58조에 따라 체포된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정치적 위협으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수용소의 운영에도 반영되었다. 일부 일반 형사범은 작업반장이나 관리 보조 인력으로 선발되었고, 무장경비대에 편입되어 다른 수감자들을 감시하기도 했다. 수감자에게 수감자를 통제하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이 방식은 관리 인력을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감자들 사이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일부에게 특권과 권한을 부여하면 다른 수감자들은 그들의 지시에 복종해야 했다. 수용소 내부에 형성된 위계질서가 통제 장치로 기능한 셈이다.
일반 형사범에 대한 우대에는 이념적인 이유도 있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범죄를 개인의 타고난 성향보다는 사회적 환경의 산물로 설명하려는 관점이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범죄자가 과거 사회의 불평등과 빈곤 때문에 범죄의 길에 들어섰다면, 새로운 사회에서는 노동과 교육을 통해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범죄자가 노동에 참여하고 생산 할당량을 달성하는 모습은 단순한 작업 실적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사회주의 체제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증거로 선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교육의 기회가 모든 수감자에게 똑같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치범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여전히 의심과 감시의 대상이었고, 수용소 내부에서 누릴 수 있는 권한도 제한되었다.
체포된 기술자들이 운하를 설계하다
벨로모르 운하 건설에는 단순 노동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수문과 제방을 설계하고, 수위와 지형을 계산하며, 복잡한 수리시설을 건설할 전문 인력도 필요했다.
당시 소련은 심각한 기술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급속한 산업화로 기술자에 대한 수요는 크게 늘어났지만 새로운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교육받은 기술자들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으로 의심받는 집단이기도 했다. 혁명 이전에 교육받고 활동한 전문가들은 출신 배경과 과거 경력 때문에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1928년 샤흐티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재판에서는 기술자들이 산업 생산을 고의로 방해했다는 사보타주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국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전문 인력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다시 국가의 건설사업에 투입된 것이다. 벨로모르 운하에서도 수감된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이 설계와 기술적 업무를 담당했다. 그들은 자유로운 전문가가 아니라 형기를 복역하는 수감자의 신분으로 자신의 지식을 제공해야 했다.
이와 같은 전문 인력의 강제 동원은 훗날 ‘샤라시카(шарашка)’라고 불리는 특수 기술시설의 운영과도 연결된다. 샤라시카는 체포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수감 상태에서 연구와 설계에 종사하는 시설이었다. 일반적인 강제노동수용소보다 생활 조건이 나은 경우도 있었지만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체제에서 기술자의 전문 능력은 국가에 필요한 자산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능력을 가진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기술은 활용하면서 기술자를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노동으로 인간을 바꿀 수 있는가
벨로모르 운하 건설을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이념은 노동을 통한 인간의 재교육이었다. 소련 당국은 강제수용소를 단순한 처벌시설이 아니라 수감자를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으로 변화시키는 교육기관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교정노동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다. 노동을 통해 수감자의 생활 태도를 바꾸고, 규율을 익히게 하며, 사회적으로 유용한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벨로모르 운하 건설에 동원된 굴라크 수감자들에게 노동을 독려하는 선전 포스터.
“운하 건설 노동병이여! 그대의 뜨거운 노동으로 형기를 녹여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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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 운영에서 재교육은 엄격한 노동 규율과 결합되어 있었다. 수감자들에게는 작업 할당량이 주어졌다. 이를 얼마나 달성했느냐에 따라 식량 배급과 처우가 달라졌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배급량이 줄어들었고, 높은 작업 실적을 올리면 추가 식량이나 형기 단축 같은 보상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수감자들이 더 많이 일하도록 유도했지만 동시에 위험한 악순환을 만들었다. 영양이 부족하거나 병약한 사람은 할당량을 채우기 어려웠고, 작업 실적이 떨어지면 식량 배급이 줄어들어 건강이 더욱 악화될 수 있었다. 노동을 통한 교화라는 명분 아래 생존에 필요한 식량 자체가 생산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수용소 당국은 작업 할당량을 초과 달성하는 사람들을 모범적인 노동자로 내세웠다. 이른바 ‘돌격노동자’들은 높은 생산성과 규율을 보여 주는 인물로 선전되었다. 그들에게 약속된 보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형기 단축과 조기 석방이었다.
여기서 강제수용소의 재교육 이념은 뚜렷한 모순을 드러낸다. 자발적인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처벌과 보상,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노동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농민들
벨로모르 운하 건설에 동원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농업 집단화 과정에서 체포되거나 추방된 농민들도 많았다.
1929년부터 본격화된 강제 집단화는 소련 농촌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당국은 부농을 뜻하는 ‘쿨라크(кулак)’를 ‘계급의 적(классовый враг)’으로 규정하고 재산을 몰수하거나 강제로 이주시켰다. 실제로는 부농뿐 아니라 집단화에 저항하거나 당국의 정책에 반대한 농민들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게 된 농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벨로모르 운하 건설에서도 농민들은 중요한 노동력의 일부를 이루었다. 그러나 운하 건설을 찬양하는 공식적인 이야기에서 이들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희미했다.
일반 형사범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인물로, 기술자는 자신의 전문 능력을 사회주의 건설에 바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들에게는 이름과 경력,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어졌다.
반면 농민들은 개별적인 인물보다는 집단적인 노동력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이유로 고향을 떠나야 했는지, 수용소에서 무엇을 경험했는지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소련의 선전이 누구를 부각하고 누구를 도외시했는지를 보여 준다.
강제수용소를 찬양한 작가들
벨로모르 운하의 건설은 공사가 끝난 뒤에도 또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운하를 건설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문학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다.

벨로모르 운하 건설을 다룬 1934년 집단 저술의 초판본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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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스탈린의 이름을 딴 백해–발트해 운하: 건설의 역사』(Беломорско-Балтийский канал имени Сталина. История строительства)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막심 고리키를 비롯해 알렉세이 톨스토이, 미하일 조셴코, 빅토르 슈클롭스키 등 36명의 작가와 문인이 참여한 집단 저술이었다.
책의 목적은 단순히 운하 건설의 과정을 기록하는 데 있지 않았다. 수감자들이 노동을 통해 어떻게 변화했으며, 강제수용소가 사회주의 건설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범죄자들은 노동을 통해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체포된 기술자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배우고 자신의 능력을 사회주의 건설에 바친다. 수용소의 관리자들은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교육자로 묘사된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강제노동은 억압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는 교육의 과정으로 제시되었다. 수용소는 처벌의 장소인 동시에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는 학교로 찬양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러한 책이 소련의 저명한 작가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집필되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문학은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수감자의 고통보다 그들을 교육하고 통제하는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작가들은 수용소의 존재를 문제 삼기보다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변화시키고 국가에 필요한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지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모든 작가가 동일한 생각과 동기로 참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의 정치적 환경과 국가기관의 개입, 작가 개인의 신념은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완성된 책이 강제수용소 체제를 정당화하는 선전물로 기능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강제수용소가 남긴 것
벨로모르 운하 건설은 소련의 강제노동 체제가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수감자 동원과 관리 경험은 이후 철도 건설, 광산 개발, 벌목 등 다양한 경제사업에 활용되었다. 벨로모르 운하는 소련의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 권력과 강제노동이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강제노동을 정당화했던 논리다. 수용소 당국은 노동이 인간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했다. 범죄자는 노동을 통해 교화되고, 기술자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배우며, 농민은 규율 있는 노동자로 거듭난다는 논리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국가와 수용소의 관리자들은 무엇이 인간에게 필요한지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인간의 자유보다 국가가 정한 목적이 앞섰다. 개인의 의사와 권리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강제노동은 처벌이면서 동시에 교육으로 설명되었고, 인간을 통제하는 행위는 그를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되었다.

백해–발트해 운하(벨로모르 운하)의 제19호 수문
By Alexxx1979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1933년 완공된 벨로모르 운하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운하가 남긴 역사적 의미는 두 바다를 연결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국가가 인간의 노동력을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든다는 명분이 어떻게 강제와 억압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역사적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