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Bastille) 감옥에는 왜 죄수가 7명뿐이었을까?

1416년경 샤를 6세 시절 완성 직후의 '바스티유 왕실 요새(Fortress of the Bastille)'를 정교하게 고증한 3D 복원도

1416년경의 바스티유 왕실 요새를 재현한 3D 복원도

By Timescope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혁명가도 정치범도 아니었던 일곱 죄수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Bastille)  습격은 흔히 성난 파리 시민들이 거대한 감옥을 점령하고 정치범들을 해방한 사건으로 묘사된다. 프랑스혁명을 다룬 그림이나 영화에서도 철창 안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요새를 점령한 시민들은 환호하며 그들을 거리로 이끌어 낸다.

그러나 실제 바스티유에서 풀려난 죄수는 단 7명이었다. 그중 혁명가나 정치범은 한 명도 없었다. 네 명은 문서 위조범이었고 두 명은 당시 정신이상자로 분류된 사람들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가족의 요청으로 수감된 귀족 솔라주 백작이었다.

그렇다면 수백 명의 시민은 고작 일곱 명을 구하려고 성벽과 대포를 갖춘 요새를 공격한 것일까?

원한 것은 죄수가 아니라 화약

바스티유로 향한 군중의 일차적인 목적은 죄수 구출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요새 안에 보관된 화약이었다.

당시 파리는 극도의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심각한 재정난과 식량 가격 상승으로 민심이 악화된 가운데 국왕 루이 16세(Louis XVI)는 재무총감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를 해임했다. 파리 주변에는 왕실 군대가 집결했다. 시민들은 국왕이 무력을 동원해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개혁 움직임을 진압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1789년 7월 14일 아침, 앵발리드에서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1789년 7월 14일 아침, 앵발리드 무기 탈취 장면

By Anonyme, graveur, CC0, wikimedia commons.

이에 파리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7월 14일 아침, 군중은 먼저 앵발리드(Invalides)로 몰려가 약 3만 정의 소총을 확보했다. 그러나 총만으로는 싸울 수 없었다. 총에 넣을 화약과 탄약이 필요했다. 앵발리드에 있던 약 250통의 화약은 이미 바스티유로 옮겨진 상태였다. 시민들이 무기를 손에 넣은 뒤 바스티유로 향한 이유였다.

바스티유는 감옥이면서 동시에 무기와 화약을 보관하는 군사 요새였다. 여덟 개의 탑과 두꺼운 성벽, 해자와 도개교를 갖추고 있었으며 대포도 배치돼 있었다. 파리 동부에 자리 잡은 이 요새가 왕실 군대의 거점으로 사용된다면 무장한 시민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텅 비어 가던 왕실 감옥

바스티유는 처음부터 감옥으로 세워진 건물이 아니었다. 14세기 파리 동쪽을 방어하기 위해 건설된 요새였지만, 훗날 국왕이 지목한 사람을 가두는 왕실 감옥으로 사용됐다.

특히 국왕 명의의 구금명령서인 ‘레트르 드 카셰(lettre de cachet)’가 발부되면 공개 재판 없이도 사람을 가둘 수 있었다. 볼테르를 비롯한 작가와 귀족, 정치적 반대자들이 이곳에 수감됐다. 바스티유가 자의적인 왕권과 비밀 구금의 표상이 된 이유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이르러 바스티유의 감옥 기능은 크게 쇠퇴했다. 수감자를 관리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낡은 시설을 폐쇄하거나 철거하는 방안까지 논의됐다.

《소돔의 120일》을 쓴 사드 후작도 바스티유에 갇혀 있었지만 습격 열흘 전 다른 시설로 이송됐다. 한때 악명 높은 왕실 감옥이었던 바스티유는 혁명 직전에는 소수의 죄수만 남은 쇠락한 시설이었다.

그래서 1789년 7월 14일, 거대한 감옥 안에 남아 있던 죄수는 일곱 명뿐이었다.

요새 함락과 100명 안팎의 희생

처음부터 전투가 예정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민 대표들은 바스티유 사령관 베르나르르네 드 로네(Bernard-René de Launay)에게 대포를 치우고 화약과 무기를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협상이 길어지는 동안 초조해진 군중 일부가 바깥뜰로 들어갔고, 수비대가 발포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왕실 군대 소속이던 프랑스 근위병 일부가 대포를 끌고 와 시민 편에 가담하자 전세가 기울었다.

바스티유 습격과 감옥을 방위하던 사령관 드 로네 후작(중앙)이 체포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바스티유 습격과 감옥을 방위하던 사령관 드 로네 후작(중앙)의 체포

By Jean-Pierre Houël,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몇 시간 뒤 드 로네는 항복했지만 시청으로 압송되던 중 격분한 군중에게 살해됐다. 군중은 그의 잘린 머리를 창끝에 꽂은 채 파리 시내를 돌았다.

당시 전투 과정에서 공격자 측 90여 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 중에서도 추가 사망자가 나왔다. 수비대 측에서는 한 명이 전사했으며, 항복 후에는 드 로네 외에도 수비 측 인사 여러 명이 군중에게 피살됐다.

프랑스혁명의 상징이 된 바스티유

바스티유 습격의 역사적 의미는 석방된 죄수의 수로 판단할 수 없다. 시민들은 화약을 확보하기 위해 요새로 향했지만, 결과적으로 국왕의 군사력과 전제권력을 상징하는 건물을 자신들의 힘으로 점령했다.

그때까지 왕의 요새는 평범한 시민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수공업자와 상인, 노동자, 일부 병사들이 힘을 합쳐 그 문을 열었다. 바스티유 함락 소식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고, 왕권도 시민의 힘 앞에서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루이 16세는 결국 파리 주변에 배치한 군대를 철수시키고 네케르의 복직을 받아들였다. 파리에서는 시민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권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스티유는 함락 직후부터 해체됐다. 철거를 맡은 사업가 피에르프랑수아 팔루아는 요새에서 나온 돌로 작은 바스티유 모형을 만들어 판매하거나 프랑스 각지로 보냈다. 억압의 상징이었던 건물의 파편이 ‘혁명의 기념품’으로 변한 것이다.

오늘날 바스티유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프랑스는 1880년에 매년 7월 14일을 국경일로 지정했고, 바스티유 함락은 프랑스혁명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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