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셤의 법칙이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의 진짜 의미

은 함량이 높은 기존 하프달러(왼쪽)는 1965년 은 함량을 낮춘 신형 하프달러 발행 후 유통에서 사라졌다.

은 함량이 높은 기존 하프달러(왼쪽)는 1965년 은 함량을 낮춘

신형 하프달러 발행 후 유통에서 사라졌다.

By BrayLockBoy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

경제학을 조금이라도 접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말이다. 흔히 질이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몰아낸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이 말은 화폐의 유통 원리를 설명하는 경제학 용어이다.

그레셤은 누구였을까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은 16세기 영국의 금융가이자 상인인 토머스 그레셤(Sir Thomas Gresham, 1519~1579)의 이름에서 유래한 경제학 용어이다.

런던 머서스 홀(Mercers' Hall)에 소장된 토머스 그레셤 경의 초상화

런던 머서스 홀(Mercers’ Hall)에 소장된 토머스 그레셤 경의 초상화

By Gresham College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그레셤은 런던의 상인이자 금융가였으며, 영국 왕실의 재정과 외환 업무를 담당한 인물이다. 특히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국왕의 재정 고문으로 활동하며 당시 영국의 화폐 문제를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레셤이 이 법칙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슷한 현상은 고대 그리스의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개구리》에서도 언급되며, 중세 유럽에서도 여러 차례 관찰되었다. 다만 그레셤이 영국 왕실에 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덕분에 그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16세기 유럽에서는 금화와 은화가 실제 금속의 가치에 기반을 둔 화폐였다. 그런데 전쟁이나 재정난이 발생하면 정부는 같은 액면가를 유지하면서도 금이나 은의 함량을 줄인 화폐를 새로 발행하는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금 10g이 들어 있는 금화와 금 8g이 들어 있는 금화는 모두 법적으로는 같은 가치의 화폐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당연히 금이 많이 들어 있는 화폐는 보관하거나 녹여 금으로 팔고, 금이 적게 들어 있는 화폐만 시장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시중에는 품질이 낮은 화폐만 남고 가치가 높은 화폐는 유통에서 점차 사라졌다.

이러한 현상을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이라고 부른다. 실제 가치가 다른 두 종류의 화폐가 같은 액면가로 함께 유통되면, 가치가 낮은 화폐만 사용되고 가치가 높은 화폐는 유통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흔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가치가 높은 화폐를 아껴 보관하는 경제적 선택의 결과를 설명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적용될까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금이나 은의 가치가 아니라 국가의 신용을 바탕으로 한 법정화폐를 사용한다. 따라서 원래 의미의 그레셤의 법칙이 나타나는 경우는 과거보다 훨씬 드물다.

다만 경제학에서는 이 법칙을 비유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품보다 불법 복제품이 시장을 잠식하거나, 품질보다 가격만을 중시하는 경쟁 속에서 저품질 제품이 우세해지는 현상을 두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엄밀한 의미의 그레셤의 법칙이라기보다 그 개념을 사회 현상에 빗댄 표현에 가깝다.

정리하면

그레셤의 법칙은 단순히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몰아낸다”는 격언이 아니다. 동일한 가격으로 평가되는 대상의 실제 가치가 서로 다를 때 사람들은 더 가치 있는 것을 아끼고 덜 가치 있는 것을 먼저 사용한다는 인간의 합리적인 선택을 설명하는 경제 원리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화폐뿐 아니라 시장과 조직,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인 경제 개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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