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무너진 성전, 사라진 좌표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남동쪽에 성전산(Temple Mount, 알 하람 알 샤리프)이라 불리는 고대의 평지 위에는 지금도 첨예한 긴장이 흐른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공통으로 신성함을 부여하는 이 땅은 인류 역사상 가장 격렬한 종교적 논쟁과 충돌의 무대였다. 그 중심에는 바로 ‘솔로몬의 성전’이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성전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다.
고대의 신전과 반복된 파괴
기원전 10세기경,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건축한 첫 번째 성전은 유대교 전통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다. 그 중심에는 지성소가 있었고, 그곳에 언약궤가 놓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 성전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침공으로 파괴되었고, 약 70년 뒤 두 번째 성전이 같은 자리에 다시 건축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로마제국에 의해 서기 70년에 완전히 무너졌다.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 일부에서는 이 성전이 다시 세워져야 메시아 시대가 도래한다고 믿는다. 반면 이슬람에서는 현재의 성전산을 자신들의 세 번째 성지로 간주한다. 문제는 바로 이 장소에 대한 주장이 서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돔 아래의 바위인가, 단지 유산인가
성전산의 바위 돔(Dome of the Rock), 픽사베이 이미지
많은 학자들은 성전이 지금의 ‘바위 돔(Dome of the Rock)’ 아래에 있었다고 본다. 황금 돔 아래에는 ‘사크라’라 불리는 자연 암반이 있다. 유대전통에서는 이 바위가 성전의 지성소가 있었던 자리라고 전해진다. 고대 유대 문헌에 따르면 이 바위는 세계창조의 시작점이자 언약궤가 놓였던 ‘기초의 돌’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주장은 단순한 역사 문제가 아니다. 현재 바위 돔은 이슬람의 성지로 기능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변경하려는 시도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온다. 단순한 고고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실제로 지역분쟁과 국제정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민감한 문제다.
더 남쪽에 있었을까
일부 연구자들은 성전이 실제로는 지금보다 더 남쪽, ‘오펠 언덕(Ophel Mound)’이라는 지역에 있었다고 본다. 이곳은 예루살렘의 주요 수원(水源)인 기혼 샘(Gihon Spring)과 가까워 유대교의 정결의식에 필요한 ‘흐르는 물’ 공급 조건에 부합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주장은 물리적 지형과 고대의 생활조건을 고려했을 때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이 이론은 주류 고고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전통적인 유적 분포와 성전산 구조물의 잔해가 현재 위치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정령의 돔이라는 대안
다른 설은 바위 돔 북쪽의 작은 이슬람 성소, ‘정령의 돔(Dome of the Spirits)’이 진짜 지성소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이다. 이곳의 암반은 사크라보다 높고, 고대 순례자 기록에 언급된 ‘구멍 뚫린 바위(Pierced Stone)’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 설은 성전의 구조적 배치에 대한 고대문헌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일각에서는 이 위치라면 바위 돔을 건드리지 않고도 제3성전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역시 현실적인 합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정령의 돔 또한 성전산 내부에 있으며, 그 공간의 영유권은 이슬람 세계 전반에 걸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더 개연성 있는 남쪽 가설
이스라엘 건축가 투비아 사기브는 또 다른 남쪽 이론을 제안한다. 그는 성전의 중심이 현재 ‘엘 카스 분수’가 있는 지점이었다고 본다. 이는 바위 돔과 알 아크사 모스크 중간 지점이며, 지형의 고도와 수로의 흐름, 고대 문헌에서 제시된 거리와 방향이 모두 일치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바위 돔 지하에서 확인된 오각형 기반 구조는 로마 시대 주피터 신전의 흔적으로 보이며, 후에 이슬람 건축이 그 자리를 계승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가설은 종교적 주장보다는 지형학과 고고학에 기초해 있어 비교적 냉정한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 역시 기존의 성전산 구조와 배치가 달라야 성립되는 주장이며, 이를 입증할 확고한 유물이 발굴된 것은 아니다.
성전이 없었다는 주장까지
가장 급진적인 시각은 아예 솔로몬의 성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슬람권 일부에서는 예루살렘이 처음부터 이슬람의 땅이었다고 주장하며 성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이는 정치적 주장의 일환으로 고대문헌과 유적분석 결과와 명백히 배치된다.
결론: 역사 속에 묻힌 가장 민감한 장소
솔로몬의 성전은 지금도 ‘어디에 있었는가’보다는 ‘다시 지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성전의 재건을 바라고 있으며, 실제로 이 목표를 위한 후원과 기금 모금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현재로서는 신전이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확정되지 않는다는 그 모호함은 지금까지 물리적 충돌을 피하게 해준 불안정한 균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솔로몬 신전이 남긴 가장 아이러니한 미스터리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