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Pharos of Alexandria)

파로스 등대 삽화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상상화, 요한 베른하르트 파셔의 『역사적 건축 설계』에서 발췌.

By 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역사적 배경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Pharos of Alexandria)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왕조 초기의 알렉산드리아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하던 시기에 건설되었다. 이 등대는 항구 입구에 위치한 작은 섬 파로스(Pharos) 위에 세워졌다.

당시 항구 주변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멀리서 접근하는 선박이 안전하게 입항하려면 뚜렷한 표식이 필요했다. 이러한 이유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Ptolemy I Soter), 혹은 그의 뒤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Ptolemy II Philadelphus)가 등대 건설을 명령한 것으로 전해진다.

건축 구조와 기술

설계는 그리스 건축가 소스트라투스(Sostratus of Cnidus)가 맡았다. 완성된 등대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높이로, 100미터가 넘는 거대한 석조물이 바다 위에 우뚝 솟았다. 일부 전승에서는 그 높이를 135미터로 기록하기도 하지만, 이는 후대의 추정으로 보인다.

구조는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하단부는 사각형의 기초 구조로 안정감을 주었고, 그 위에 세워진 팔각형 중간층은 바람의 영향을 최소화하며 위로 이어졌다. 최상부의 원형 탑에서는 불이 타올랐고, 그 불빛은 청동 거울에 반사되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에서도 식별할 수 있었다.

구조를 이루는 모든 돌은 밝은 색의 석재로 정교하게 다듬어 쌓았다. 틈새에는 녹인 납을 부어 견고함을 더했으며, 낮에는 연기가, 밤에는 불빛이 바다를 가르는 신호가 되어 항해자들에게 무엇보다 확실한 길잡이가 되었다.

기능과 역할

파로스(Pharos) 등대는 항구의 상징이자 지중해 항로의 안전망이었다. 먼 거리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불빛 덕분에 배는 방향을 잃지 않고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이 등대는 단순히 항로를 안내하는 시설을 넘어, 항구를 지키는 방어망의 일부로 작동하며 전략적 중요성을 더했다. 무역선과 군함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파로스 등대 코인

로마 시대의 동전에 새겨진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

By Francesco Bini,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파괴와 소멸

수 세기 동안 그 자리를 지켰던 등대는 반복되는 지진 앞에 결국 무너졌다. 기원후 956년, 첫 번째 대규모 지진이 구조를 흔들었고, 이후 1303년과 1323년 두 차례의 강진이 남은 부분마저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14세기 중반에 이르면 등대는 더 이상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고, 폐허로 변했다. 15세기 말에는 그 터 위에 카이트베이 요새(Citadel of Qaitbay)가 세워져, 등대의 마지막 흔적마저 새로운 건물 속에 묻히게 되었다.

고고학 발굴

20세기 말, 알렉산드리아 해저에서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졌다. 1994년, 프랑스 해양고고학 연구팀이 알렉산드리아 동항에서 본격적인 해저 발굴을 시작하여, 등대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석재와 장식 조각을 비롯해 기둥, 조각상, 무게 40~60톤에 달하는 화강암 블록 등을 확인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추가 조사로 더 많은 유물이 드러났으며, 일부는 현재 알렉산드리아 국립박물관과 해저 박물관에 보관·전시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고대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등대의 구조와 규모를 실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학계의 복원 연구에도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문화적 영향

파로스 등대는 사라진 뒤에도 언어와 건축, 문화 속에 오랫동안 흔적을 남겼다. 특히 ‘파로스’라는 이름은 여러 유럽 언어에서 ‘등대’를 뜻하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고, 후대 등대 설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대와 중세의 지도 제작가들은 ‘Pharos’라는 이름을 항로 표식에 사용했고, 작가와 시인들은 이를 안전한 항해와 귀환의 상징으로 묘사했다. 고대 지중해의 해상 네트워크 속에서 파로스 등대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문명의 길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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