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도라도: 존재하지 않는 보물을 향한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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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시작: 한 사람에서 도시로

엘도라도(El Dorado)는 원래 특정한 지역이나 도시의 이름이 아니었다. 스페인어로 ‘도금된 자(the Gilded One)’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16세기 초 남아메리카 고지대에 거주하던 무이스카(Muisca)족의 종교 의식에서 유래했다.

무이스카 사회에서 지도자이자 제사장 역할을 하던 인물은 향유(발삼)를 온몸에 바르고, 금가루를 온전히 뒤집어쓴 채 신성한 호수에 몸을 담갔다. 이 의식은 즉위식이자 신성한 헌납행위였고, 동행한 귀족들은 과타비타 호수(Lake Guatavita)에 금 장신구와 보석을 던졌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곧장 과장된 해석을 붙였다. ‘금가루를 입는 제사장이 존재했다면 이 지역 전체가 금으로 가득한 도시일 것’이라는 식의 추론이 뒤따랐다. 전해들은 원주민조차 이 전설을 점차 주변 부족, 그리고 그 너머의 땅 이야기로 넘겼고, 결국 ‘엘도라도’는 장소 없는 환상의 지명이 되어갔다. 이는 이후 유럽에서 황금의 도시를 의미하는 상징어로 굳어졌다.

탐욕의 점화: 잉카 제국과 금의 환상

전설이 불붙기 시작한 배경에는 잉카제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들이 있었다. 1532년, 잉카의 군주 아타우알파(Atahualpa)는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에게 포로로 잡히자 석방 조건으로 방 하나를 금으로 가득 채우는 몸값을 제시했다.

이 제안은 곧 실행으로 옮겨져 피사로 일행은 엄청난 부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정복자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금을 모을 수 있었다면 어딘가에 훨씬 더 큰 보물창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이후 잉카의 저항군을 이끈 만코 잉카(Manco Inca)가 정글 속으로 후퇴하자 그가 금을 숨기고 사라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동시에 스페인 정복자들은 ‘더 깊은 곳, 더 동쪽에 진짜 황금 도시가 있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게 된다. 이처럼 탐욕과 오해, 불완전한 정보가 뒤섞이며 엘도라도는 점점 더 환상적인 모습으로 확대되었다.

과타비타 호수와 엘도라도 탐사의 반복

이미지: Masanalv / Wikimedia Commons / CC BY 3.0

정복자들은 과타비타 호수가 전설의 핵심 장소라고 믿고 직접 탐사에 나섰다. 1545년, 가장 이른 시도의 하나로 호수의 수위를 낮추기 위해 두레박 체인을 사용하는 방식이 동원되었다. 1580년에는 호수 가장자리를 절개해 수위를 20미터 가까이 낮추는 시도도 있었다. 두 경우 모두 소량의 금속류와 보석이 발견되었지만 기대했던 규모의 보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모한 배수작업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한편, 마노아(Manoa)라는 이름의 황금도시 전설이 퍼지면서 새로운 탐사 대상이 떠올랐다. 어느 날 정글에서 나타난 후안 마르티네스(Juan Martinez)라는 인물이 자신은 수년간 마노아에서 생활했으며, 엘도라도를 직접 보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증언은 전설에 더욱 신빙성을 더했고, 정복자 안토니오 데 베리오(Antonio de Berrio)는 이를 토대로 가이아나 내륙으로 수차례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고, 그는 결국 전 재산을 잃은 채 생을 마감했다.

정치와 신화: 영국 탐험과 엘도라도 지도화

엘도라도 전설은 스페인을 넘어 유럽 열강의 관심까지 끌어들였다. 1595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정치가이자 탐험가였던 월터 롤리(Sir Walter Raleigh)는 트리니다드섬을 점령했다. 그는 안토니오 데 베리오를 생포한 뒤 오리노코강 유역을 직접 탐사했다.

귀국 후에는 『The Discoverie of the Large, Rich, and Bewtiful Empyre of Guiana』라는 책을 출간하여 마노아와 엘도라도 전설을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지도가 유럽 전역의 지도집에 인용되면서 엘도라도는 실존하는 장소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그의 실제 탐험은 기대와 달리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마지막 원정에서는 아들을 잃었고, 스페인 정착지와의 충돌로 궁정의 신뢰를 잃은 끝에 처형되었다.

전설의 결말과 유산

19세기 초, 독일의 자연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는 남아메리카 내륙을 탐사하며, 전설 속 파리마 호수(Lake Parima)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써 마노아 전설이 구체적인 지리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처음으로 명확히 드러났다.

1912년에는 현대식 배수장비를 동원한 대규모 호수 배수작업이 있었지만 결국 진흙과 점토만 남았고, 회수된 금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무이스카 뗏목, 수정: Egaldudu / CC BY-SA 2.0

그러나 1969년, 보고타 인근 동굴에서 선사시대 금 공예품 ‘무이스카 뗏목(Balsa Muisca)’이 발견되며 전설의 기원이 문화적 실체를 갖고 있었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금가루를 입은 왕과 수행자들이 뗏목에 올라 있는 이 조각은 당시 의식을 그대로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오늘날 엘도라도 전설을 상징하는 유물로 남아 있다. 엘도라도는 실재하지 않았지만 실제 역사와 문화에서 출발한 신화였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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