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도서관. 픽사베이 AI 생성 이미지
신화로 남은 지식의 제국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식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그 명성은 단순한 자료저장소를 넘어 철학과 과학, 의학, 문학을 아우르던 학문의 중심지라는 상징을 품고 있다. (새탭에서 열기)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이 도서관은 유클리드, 에라토스테네스, 갈레노스 등 수많은 지성들이 머물던 장소였으며, 인류가 축적한 지식이 하나의 도시에 집중된 사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도서관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설은 쌓여가고, 실체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나의 도서관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단일한 건물이나 기관이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왕립 도서관으로 ‘뮤제이온(Museum)’이라 불린 학문연구소와 함께 운영되었지만 이 외에도 여러 부속도서관이 존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라피움(Serapeum)에 있었던 도서관이다. 이곳은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건설한 신전으로 로마 시대에 이르러 주요 장서보관소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의 지식저장소는 도시 전역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고, 각 시대마다 성격과 기능이 달랐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는 표현 자체가 복수의 장소와 시기를 아우르는 추상적 개념에 가깝다.
숫자의 신화
일부 전승에 따르면 이 도서관에는 50만 권에서 70만 권에 이르는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대 도서관의 규모를 감안할 때 이 수치는 지나치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로마의 트라야누스 도서관은 약 2만 권, 페르가몬 도서관은 약 3만 권 규모였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를 분류한 것으로 알려진 칼리마코스(Callimachus)의 목록 『핀학스(Pinakes)』는 약 120권 분량에 불과하다. 이는 수십만 권을 아우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필사오류나 전승자의 과장이 누적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며, 초기 기록의 신빙성도 떨어진다. 결국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는 후대의 상상력이 덧씌워진 환상에 가까울 수 있다.
파괴의 범인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가장 흔히 거론되는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 첫째, 기원전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불질렀을 때 도서관도 함께 소실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에는 도서관 파괴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당시 불탄 것은 항구의 창고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 둘째, 서기 391년, 기독교 주교 테오필루스가 이끄는 군중이 이교 신전인 세라피움을 파괴하며 도서관까지 함께 없앴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도서관이 존재했는지, 혹은 이때 완전히 파괴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 셋째는 640년 이슬람군의 칼리프 오마르가 코란과 일치하지 않는 책은 이단이며, 일치하는 책은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도서관을 태웠다는 전승이다. 하지만 이는 중세 이후 형성된 반이슬람적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현대 역사학자 제임스 해넘(James Hannam)은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기원전 2세기)의 폭정이 결정타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또한, 테오필루스 이전 주교였던 조지(George of Cappadocia)가 이미 세라피움을 약탈하고 장서를 개인 소장으로 전용했을 가능성도 지적하고 있다.
정말 파괴되었는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단번에 파괴된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로마의 내전, 반란, 기독교화 과정, 외적 침입 등 다양한 사건 속에서 장서와 건물은 조금씩 흩어지고 훼손되었을 것이다. 고대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기원후 20년경의 저술에서 도서관을 ‘과거형’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이미 그 무렵 실질적으로 기능을 상실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서기 56년에 죽은 클라우디우스 발빌루스가 ‘알렉산드리아 박물관과 도서관의 책임자’였다는 로마의 비문은 이들이 적어도 1세기 중반까지는 존재했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하지만 이마저도 왕립도서관이 아닌 세라피움 쪽일 수 있으며 기록은 여전히 단편적이다.
흔적을 쫓는 사람들
도서관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북동부, 브루키온(Bruchion) 구역이 유력한 후보지이며, 이곳은 왕궁과 학술기관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다. 2004년, 폴란드‒이집트 공동조사팀이 이 구역에서 13개의 강의실 형태 유적을 발굴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중앙 강단과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 구조를 갖추고 있었고, 고대 학문 공간의 실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한편 1970년대에는 ‘모비우스 그룹’이라는 초감각 탐사팀이 심령술과 잠수 기술을 결합해 도서관을 찾으려 했던 시도도 있었다. 이들은 클레오파트라의 궁전 일부 유적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으나 왕립도서관의 실체는 끝내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