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마노바(Palmanova)
By IlirikIlirik, CC0, wikimedia commons.
기념일에 태어난 요새 도시
팔마노바(Palmanova)는 1593년 10월 7일,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세워진 인공 도시이다. 이날은 두 가지 상징적인 날이 겹쳤다. 하나는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 유스티나(Saint Justine) 축일이었고, 또 하나는 레판토 해전(1571)의 승리 2주년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견제하던 베네치아는 이 도시를 단순한 방어요새가 아닌, 가톨릭과 서방문명의 이상을 상징하는 계획도시로 설계했다.
팔각별처럼 펼쳐진 성벽
2003년 3월 18일 ASTER 위성 센서로 촬영
By NASA,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팔마노바의 구조는 정다각형 중심의 방사형 도시 계획이자 16세기 군사공학의 결정체이다. 도시는 아홉 개의 꼭짓점을 지닌 별 모양의 요새로 설계되었고, 세 겹의 방어 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성벽은 화살촉 모양의 바스티온(Bastion)이 서로의 측면을 방어하도록 배치되어, 하나의 진지가 공격받아도 다른 성벽이 교차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짜여 있다.
도시 전체는 넓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으며, 세 개의 문(Porta Cividale, Porta Udine, Porta Aquileia)을 통해 도시로 진입할 수 있다. 각각의 문은 성과 같은 구조로 방어 기능을 갖췄으며, 동시에 건축적 아름다움도 잃지 않았다.
르네상스 이상주의가 반영된 도시 설계
팔마노바 중심의 육각형 대광장(Piazza Grande), 일명 무기광장(piazza d’Armi)
By Claconvr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팔마노바는 단순히 전쟁을 위한 도시가 아니었다. 건설 당시 베네치아는 이상적인 인간 중심 도시, 즉 ‘유토피아’의 실현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지시했다.
도심은 육각형 광장, 그 중심에서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도로망, 정밀하게 대칭을 이루는 구획들은 사회적 질서와 조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이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 그리고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같은 르네상스 건축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파괴되지 않은 도시, 살아 있는 문화유산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카포레토 전투 당시 후퇴 중 일부가 불탔지만, 도시 전체가 파괴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철거 위기에서는 멀리노 신부의 설득이 도시를 지켜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보존된 팔마노바는, 201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인류의 도시건축 유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 전략과 이상이 공존하는 도시 설계의 실험장이었기 때문이다.
결론
팔마노바는 르네상스 후기, 베네치아가 꿈꾼 이상적 방어도시의 구현체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곳에서 단지 아름다운 별 모양의 성곽이 아니라, 문명의 위기 속에서도 조화와 질서를 설계하려 했던 인간의 의지를 목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