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 대지의 심연을 마주하다

무지개 뜬 그랜드 캐니언

호피 포인트에서 내려다본 그랜드 캐니언, 무지개가 드리운 풍경

By Tuxyso ,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아메리카 대륙의 심장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협곡.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은 단지 하나의 풍경이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의 시간이 새겨진 서사시다. 이는 어떤 인공의 구조물도 흉내 낼 수 없는, 대지의 오랜 기억이자 인간의 인식 너머를 일깨우는 장면이다.

협곡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랜드 캐니언은 한순간의 격변이 아니라, 수천만 년에 걸친 침식과 지반 융기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약 7000만 년 전부터 시작된 지각 운동의 영향으로 콜로라도 고원(Colorado Plateau)이 점진적으로 융기했고, 이후 수천만 년에 걸쳐 현재와 같은 고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약 500만 년 전부터 콜로라도 강(Colorado River)이 이 고원을 가로지르며 암석을 침식해갔다. 지반의 지속적인 융기는 강의 낙차를 더욱 키웠고, 이로써 강물은 더 깊이, 더 집요하게 암석을 파고들었다.

강이 뚫어낸 협곡의 벽면에는 선캄브리아기부터 고생대에 이르는 퇴적암층이 켜켜이 남아 있다. 이는 약 20억 년에 이르는 지구의 지질사를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지질학적 성소라 할 만하다. 층마다 다른 색조는 각기 다른 기후와 환경, 생명체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지구가 바다였다가 사막이 되고, 다시 숲으로 변모한 기록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남쪽과 북쪽, 두 얼굴의 캐니언

그랜드 캐니언을 마주하는 대표적인 관문은 남쪽의 사우스 림(South Rim)과 북쪽의 노스 림(North Rim)이다. 사우스 림은 해발 약 2,100m, 노스 림은 약 2,400m에 이르며, 계절과 기후, 식생, 분위기까지 전혀 다른 체험을 제공한다.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 림

그랜드캐니언, 사우스 림의 한 전망대에서. (2018년 9월 9일)

By Don McCulley – Own work, CC0, wikimedia commons.

사우스 림은 비교적 접근성이 좋고, 야바파이 전망대(Yavapai Point)나 마더 포인트(Mather Point) 같은 명소를 통해 거대한 협곡의 스펙터클을 조망할 수 있다. 국립공원 내에 보존된 20세기 초의 목조 건물들과 림 트레일(Rim Trail)을 따라 이어지는 풍경은, 이곳이 단지 자연이 아니라 인간과의 역사 또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랜드 캐니언 노스림

애리조나주 노스 림, 브라이트 엔젤 포인트 근처에서 바라본 그랜드 캐니언의 풍경

By Thomas Wolf,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노스 림은 한적함과 고요로 대변된다. 눈 덮인 고원과 침엽수림, 협곡 아래로 이어지는 야생의 길은 인간의 흔적보다 자연의 침묵을 더 가까이에서 느끼게 한다. 특히 여름철에만 개방되기 때문에, 이 짧은 계절의 정적과 사색을 찾는 이들에게 더욱 매혹적인 공간이다.

강을 따라가며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그랜드 캐니언 리프팅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 하바수 크리크 아래를 따라 콜로라도강을 내려가는 보트 여행

By Grand Canyon National Park,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진짜 그랜드 캐니언을 이해하려면 위에서 내려다보기 보다는 협곡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콜로라도 강은 단지 이 협곡을 만든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그 경계를 조금씩 바꾸어가는 조형가이기도 하다. 수많은 여행자는 리스 페리(Lee’s Ferry)에서 시작하는 래프팅 투어를 통해 강과 함께 협곡의 내부로 들어간다.

급류를 타고 흐르다 보면 수직 암벽 아래에 숨겨진 측협곡(side canyon), 오랜 풍화 작용으로 형성된 천연 아치, 수천 년 전부터 거주해 온 푸에블로 원주민(Pueblo peoples)의 유적지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여정은 1869년, 한 팔을 잃은 전직 군인이자 지질학자였던 존 웨슬리 포웰(John Wesley Powell)이 최초로 시도했던 탐험의 경로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던 미지의 공간을 목숨 걸고 누볐고, 그 여정은 미국 탐험사의 전설로 남았다.

하늘에서 본 심연

수직으로 파인 협곡의 크기는 사실 땅 위에서는 온전히 실감하기 어렵다. 상공에서 내려다볼 때 비로소, 콜로라도 강은 하나의 실선처럼 보일 만큼 거대한 대지의 절개선으로 인식된다. 헬리콥터 투어나 소형 비행은 라스베이거스나 사우스 림 공항에서 출발하며, 위에서 본 협곡의 형상은 마치 살아 있는 지구의 단면도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이러한 비행은 자연보존을 위한 엄격한 규제 아래 운영된다. 대부분의 항공기는 협곡 중심부에 진입하지 못하고, 국립공원 외곽에 해당하는 지역만을 비행한다. 대표적인 예가 왈라파이(Hualapai) 부족 보호구역이다.

인간보다 오래된 마을, 유리 위의 절벽

그랜드 캐니언 skywalk

그랜드 캐니언 웨스트림, 절벽 위로 돌출된 유리 바닥 전망대 ‘스카이워크(Skywalk)’

By Boris Dzhingarov, CC BY 2.0, wikimedia commons.

왈라파이 부족은 오랜 세월 이 협곡과 공존하며 살아온 원주민들이다. 이들의 영토에는 스카이워크(Skywalk)라는 이름의 유리 바닥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다. 말발굽 모양으로 돌출된 이 구조물은 약 1,200m 아래 협곡 바닥이 내려다보이며, 유리 위를 걷는다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감각을 시험하는 경험이 된다.

반면, 서쪽의 하바수파이(Havasupai) 부족 보호구역에는 청록빛 폭포로 유명한 하바수 크리크(Havasu Creek)가 흐른다. 사막 지형에 감도는 환상적인 오아시스와도 같은 이 풍경은 그랜드 캐니언내에서도 가장 신비롭고 감성적인 장면 중 하나다. 보호구역은 사전 예약 없이는 접근이 불가능하며, 철저한 방문자 수 제한으로 인해 자연의 고유성과 원주민의 생활권이 존중되고 있다.

그랜드 캐니언 하바수

애리조나주 하바수파이 원주민 보호구역 내 하바수 캐니언에 위치한 하바수 폭포

By Brent Sisson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땅의 기억, 인간의 책임

그랜드 캐니언은 단지 깊고 넓은 협곡이 아니다. 그것은 지구의 표면 아래에 감춰진 오랜 시간이 드러난 하나의 기억의 단면이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연과 어떻게 공존할지를 시험하는 장소다.

이곳의 암석은 말을 하지 않지만, 보는 이의 감각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언어로 속삭인다. 일출 무렵 붉게 불타는 벽면, 해질 무렵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골짜기, 비가 내릴 때 더욱 선명해지는 지층의 색감. 그랜드 캐니언은 매 순간 스스로를 다시 쓰는 시간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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