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흡수 때문은 아니다
물 속에 오래 있다보면 손가락과 발가락 끝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는 현상을 누구나 경험한다. 흔히 피부가 물을 흡수해 불어난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다면 왜 팔뚝이나 몸통 등 다른 부위는 전혀 변화가 없는 걸까.
과학자들은 최근 이 현상에 신경계가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피부 속 혈관이 수축하면서 표면적이 줄고, 그 결과 손가락 끝에 골짜기 모양의 주름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숨겨진 진화의 목적
흥미로운 점은 이 주름이 단순한 피부 반응이 아니라 젖은 환경에서 물체를 더 잘 다루기 위한 적응일 가능성이다. 2013년 영국 뉴캐슬 대학교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젖은 물체와 마른 물체를 잡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비교적 분명했다.
- 마른 물체에서는 주름이 있든 없든 차이가 없었지만,
- 젖은 물체를 잡을 때는 손가락 주름이 있는 쪽이 훨씬 안정적이고 빠르게 물체를 다룰 수 있었다.
이 연구는 손가락 주름이 단순한 피부 반응이 아니라, 빗길에서 타이어의 홈이 물길을 만들어 미끄럼을 막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경이 없으면 주름도 없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손가락 신경이 손상된 경우에는 물에 오래 담가도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물이 세포 안으로 들어와 손끝 표층 피부가 수동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뇌와 신경이 혈관을 조절해서 나타나는 능동적 반응임을 뒷받침한다.
아직 남아 있는 의문들
손가락 주름이 젖은 물체를 더 잘 잡게 돕는다는 연구 결과는 설득력이 있지만, 모든 학자가 이 기능적 설명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실험실 조건에서는 분명 이점이 보이지만, 실제 야생 환경이나 일상에서 얼마나 큰 생존상의 이득을 주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손가락 주름의 형성 메커니즘이 신경계가 관여하는 능동적 반응임이 확인되었으나, 왜 이런 반응이 인류 진화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유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다. 즉, 주름이 젖은 물체를 다루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손가락 주름의 ‘주된 목적’인지, 혹은 단순히 신경·혈관 반응의 부산물인지에 대해서는 확정적인 답이 없다.
마무리하며
물을 만지면 생기는 손가락 주름은 단순한 ‘피부의 불편한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젖은 환경에서도 물체를 잘 붙잡을 수 있도록 돕는 진화의 흔적일 수 있다. 다만 그 진화적 의미가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작은 현상 속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