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마의 역사: 열에서 화학으로, 기술에서 문화로

파마머리를 한 여성의 클래식한 이미지

웨이브가 유행이 되다

19세기 말 유럽의 대도시에서 웨이브와 컬은 단순한 미용을 넘어 근대적 취향의 표식이 되었다. 그 변화의 선두에는 1882년경 마르셀 그라토(Marcel Grateau)가 도입한 가열 집게 기술이 있었다.

달군 금속 집게로 머리카락을 한 타래씩 집어 물결을 만드는 ‘마르셀 웨이브’는 높은 숙련과 긴 시술 시간을 요구해 처음에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이 유행은 개인의 외모를 대중사회 속 ‘보이는 정체성’으로 만들었고, 머리 모양은 곧 사회적 신호로 기능하게 되었다.

퍼머넌트(파마)의 발명

웨이브를 오래 유지하려는 욕망은 곧 기술 혁신으로 이어졌다. 제네바와 파리에서 일하던 카를 네슬러(Karl Nessler)는 반복 실험 끝에 1906년 영구 웨이브(permanent wave) 장치를 특허로 묶었다.

공정은 이러했다. 머리카락에 가성소다(알칼리 용액)를 바른 뒤, 두피에서 떨어뜨린 롤러에 감아 전기로 가열해 구조를 고정한다. 머리카락의 단백질 결합 일부를 열·알칼리로 느슨하게 만든 뒤 새 형태로 식혀 고정하는 원리였다. 장비와 시간이 많이 들었고 화상·모발 손상 위험도 컸지만, 효과는 분명했다.

곧 런던에 ‘영구 곱슬머리의 집’이라는 간판이 걸렸고, 1차 대전의 격변을 거치면서도 네슬러식 파마는 기술 개선과 함께 생존했다.

영화와 해방의 20년대

대전 후 ‘황금의 20년대’에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일상 복장이 달라지면서 움직임에 자유를 주는 헤어스타일이 표준이 되었다. 패션의 주도권도 귀족에서 영화배우로 옮겨갔다. 스크린 위에 재현된 컬과 웨이브는 대중적 욕망을 조직하고, 미용실은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기술의 무대가 되었다. 파마는 더 이상 소수의 사치가 아니라, 근대적 여성성의 실용적 틀로 자리 잡았다.

기술의 전환

초기의 전기 열파는 온도 200도 안팎까지 올리는 위험한 공정이었다. 1930년 전후에는 유성 용액과 가습을 활용해 건조·손상을 완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1935년 무렵 ‘화학 파마’가 본격화되었다.

원리는 간단하다. 머리카락을 이루는 케라틴의 결합을 화학적 처리로 느슨하게 한 뒤 롤러로 형태를 잡고 다시 고정(산화)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장비는 간소화되고, 시술 시간도 줄어들었다. 각국 미용 현장에 이 방식이 퍼지면서 파마는 산업 표준 기술로 정착했다.

전후 파마의 대중화

파마_헐리우드의 영향력

194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머리 길이와 상관없이 컬과 웨이브가 주류가 되었고, 파마는 여성 헤어스타일의 대표 규범으로 통용되었다. 전후 경제 성장과 도시화는 미용산업을 키웠고, 롤러와 화학 로션을 결합한 냉파(콜드 퍼머) 등 다양한 변형법이 등장해 사용성을 높였다. 이 시기 파마는 특정 계층의 유행을 넘어, 넓은 사회계층에서 일상의 미적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

안전과 효율, 개성의 균형

파마의 역사는 안전, 효율, 개성의 세 축이 균형을 찾는 과정이었다. 초기 열파는 빠르고 강력했지만 화상과 손상 위험이 컸다. 화학 파마는 위험을 낮추고 시간·비용 효율을 높였지만, 정해진 롤과 약제 조합은 한동안 스타일의 획일화를 낳았다.

이후 제품과 공정이 다양해지면서, 파마는 다시 개성의 언어를 회복했고, 패션·직장·여가의 요구에 맞춰 세팅의 자유도를 확장했다. 기술은 미적 규범을 만들고, 규범은 다시 기술의 방향을 정교하게 조정했다.

파마’의 문화적 의미

파마라는 이름은 기술이 약속한 지속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실제로 파마의 지속은 모발의 생장·손질 습관·약제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영구(permanent, 파마)라는 말은 기술 브랜드이자 문화적 기표였다. 그것은 시간을 통제하려는 근대의 의지, 그리고 개인의 외모를 스스로 설계하려는 주체성을 드러낸다. 파마의 역사는 곧, 기술이 미(美)를 민주화하는 과정의 축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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