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공들여 드라이한 머리가 집을 나서는 순간, 습기 때문에 곱슬거리거나 모양이 무너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치 머리카락이 기상캐스터처럼 “오늘은 습하다”고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실제로 이 현상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 분자 수준의 화학 반응 때문이다.
머리카락의 뼈대, 케라틴
머리카락은 대부분 케라틴(keratin)이라는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케라틴 섬유는 두 가지 결합으로 형태를 유지한다.
- 이황화 결합(다이설파이드 브리지): 매우 강력해 열이나 화학 처리로만 끊어진다. 파마는 이 결합을 인위적으로 끊고 다시 결합해 새로운 모양을 고정하는 방식이다.
- 수소 결합: 훨씬 약하고 물에 민감하다. 건조한 공기에서는 일정하게 유지되지만, 습도가 높아지면 쉽게 끊어지고 무질서하게 다시 맺힌다.
습기와 머리카락의 변형
공기가 습하면 머리카락 속에 수분이 스며들어 수소 결합이 흔들린다. 이 과정에서 머리카락은 원래의 세팅을 잃고, 새로운 결합이 제멋대로 맺히면서 곱슬거리거나 모양이 무너진다. 그래서 드라이어나 고데기로 완벽하게 말린 머리도 비 오는 날 외출하면 한순간에 흐트러진다.
머리카락이 만든 과학 도구
소쉬르의 머리카락 습도계
By Charles Christopher Trowbridge,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흥미로운 사실은 이 성가신 현상이 재미있는 과학적 발상을 낳기도 했다는 점이다. 18세기 스위스 과학자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Horace Bénédict de Saussure)는 머리카락이 습도에 따라 길이가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를 이용해 머리카락 습도계(hygrometer)를 발명했는데, 일종의 ‘머리카락 날씨 예보기’ 같은 거 였다.
마무리하며
머리카락이 습기에 반응하는 이유는 단순한 습도 변화 문제가 아니라, 단백질과 분자 결합의 과학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쁜 헤어데이를 맞을 때마다 사실은 작은 실험실을 몸에 달고 다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