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보다 중요한 구조
2020년대 중반, 전기차(EV) 전환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각국은 내연기관 차량의 퇴출 시점을 명시하고 있으며, 자동차 산업은 기술과 정책의 격변기를 지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국과 유럽은 빠른 속도와 큰 규모로 전기차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중국은 생산중심 전략, 유럽은 규제기반 전환을 택했다. 중국은 대규모 생산과 수출확대에 집중하는 반면 유럽은 법제화와 기술적 기준 마련을 우선시하고 있다. 같은 전환이라도 방향과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처럼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구조로 이행하느냐의 문제다.
중국: 가격과 규모로 승부하는 전환
중국은 세계 최대의 전기차 시장이자 가장 빠른 보급속도를 보이고 있다. 2023년 기준, 중국 내 신에너지차(NEV) 판매비중은 전체 자동차의 약 30%를 넘어섰으며, BYD는 같은 해 테슬라를 제치고 전 세계 전기차 판매 1위에 올랐다. 이런 추세는 내수에만 머물지 않는다. 중국은 이제 동남아, 남미, 중동, 유럽까지 진출하며 수출 중심 산업으로 전환 중이다.
중국의 전략은 생산비용 절감과 대량공급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배터리 분야의 핵심 기업인 CATL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중심으로 고가기술보다 저비용·안정성 중심의 제품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2024년 현재 CATL의 글로벌 배터리 점유율은 약 36%에 이르며, BYD 역시 자체 배터리 기술을 확보한 상태다.
게다가 중국은 전기차 수출과 함께 배터리 공장, 충전 인프라, 소프트웨어 플랫폼까지 결합한 패키지 수출모델을 실현하고 있다. 헝가리, 브라질, 태국 등지에서의 생산기지 확보는 단순한 수출국이 아닌 글로벌 제조·유통 네트워크 주도국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유럽: 기술과 규제 기반의 구조적 전환
유럽연합(EU)은 2035년부터 휘발유·디젤차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채택했고, 이에 따라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각자 강도 높은 탄소중립 이행계획을 실행 중이다. 이러한 전환은 기술적 완성도와 에너지 생태계 전체를 아우르는 접근을 요구한다.
그러나 유럽의 자동차 산업은 여전히 기존 내연기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플랫폼 전환의 병목을 겪고 있다. 폭스바겐은 MEB(모듈형 전기구동시스템) 플랫폼을 바탕으로 전기차 라인업을 확장 중이지만 전통적인 부품망과 공급구조가 발목을 잡고 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고가인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 기반의 전략은 중국산 저가 전기차와의 가격경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에 대응해 2024년 중국 전기차에 대한 반보조금 조사에 착수했다. 시장왜곡을 이유로 향후 추가관세 부과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으며, 프랑스는 중국산 전기차에 지급되는 보조금을 차단하는 등 방어적 정책을 펴고 있다.
유럽은 기술과 정책 주도권을 유지하려 하나 배터리 공급망에서는 여전히 중국산 부품에 의존하고 있다. 정책은 독립적이지만 실제 공급구조는 종속적인 이중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이 구조적 모순은 유럽 전기차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흔들 수 있는 핵심 변수다.
미국: 공급망 중심의 내향적 전략
미국은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를 통해 전기차 전환에서 다른 길을 선택했다. 보조금을 지급받기 위해서는 북미산 배터리 사용과 자국 내 최종 조립이라는 조건이 붙고, 이는 사실상 중국산 부품에 대한 우회적 배제조치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판매확대보다 공급망 자립을 우선시하는 전략을 택했다. 전기차 전환의 속도를 조절하면서도, 배터리 원자재 확보와 생산의 국산화를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한 전기차 보급을 넘어선다. 광산 개발, 리튬 정제, 배터리 재활용 체계 구축 등 배터리 밸류체인의 내재화에 초점을 맞춘 장기 전략이다.
GM, 포드, 테슬라 등 주요 기업들이 관련 프로젝트에 공동 투자 중이며, IRA 이후 미국 내 배터리 공장 신규 착공 건수는 30곳 이상으로 증가했다. 결국 미국은 글로벌 전기차 판매 경쟁보다 내부 공급망 강화와 산업기반 자립을 통해 미래 전기차 시장에서 지렛대를 확보하려는 경로를 택한 것이다.
구조의 전환, 기술의 전환
전기차 전환은 단순히 내연기관 차량을 대체하는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 시스템, 원자재 확보, 배터리 제조, 충전 인프라, 국제무역까지 전방위에 걸친 전환이다. 각국은 자국 산업과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전기차 전략을 조율하고 있으며, 이 전략의 차이가 바로 ‘속도전’의 본질을 결정하고 있다.
중국은 속도와 가격, 유럽은 기술과 제도, 미국은 공급망과 산업 독립에 각각 방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전략은 하나의 산업 지형 위에 연결되어 있다. 전기차는 단순한 소비재를 넘어 국가 산업 구조를 재편하는 전략적 핵심 분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