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블록(economic bloc), 통상에서 전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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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한때 관세를 낮추고 무역 장벽을 허무는 데 집중했다. 자유무역협정(FTA), 관세동맹, 공동시장이 번성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이제 국경을 넘는 교역의 논리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지금 세계는 단순한 무역 협정을 넘어, 기술과 자원, 안보와 규범이 교차하는 경제블록(economic bloc)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경제블록의 전통적 개념

경제블록(economic bloc)은 본래 여러 국가들이 관세와 무역 장벽을 줄이고 경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지역 경제 공동체를 뜻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유럽연합(EU),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현재는 USMCA), 동남아국가연합(ASEAN) 등이 있다. 이들 블록은 무역 확대, 투자 유치, 생산성 향상이라는 목표 아래 제도적 통합을 추구하며, 일정 수준의 공동 규범과 법적 구속력을 바탕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전통적 경제블록은 통합의 수준에 따라 구분된다. 가장 낮은 단계는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회원국 간 관세를 없애되 외부 국가에 대해서는 각국이 독자적 무역 정책을 유지한다. 그다음은 관세동맹으로, 역내 무역 자유화와 동시에 공동의 대외관세를 채택한다. 공동시장 단계에서는 노동, 자본 등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며, 마지막으로 경제통합은 단일통화, 공동의 경제정책, 나아가 정치 통합까지 포함한다. 유럽연합은 이 모든 단계를 실현한 거의 유일한 사례로 꼽힌다.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흐름

그러나 2010년대 후반 이후 세계는 경제블록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미중 무역갈등, 팬데믹 이후의 공급망 혼란, 반도체 및 희토류 같은 전략물자의 지정학적 중요성 확대는 기존의 자유무역 중심 논리를 약화시켰다. 그 대신, 기술·자원·안보를 중심으로 한 전략적 블록경제가 부상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제도 기반 협정이 아니라, 지정학적 정렬과 정치적 유대, 산업별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형성되는 협력 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미국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반도체 공급망 동맹(Chip 4), 미-EU 기술무역협의체(TTC) 등을 통해 중국 중심 공급망과의 탈동조화(decoupling)를 추진 중이다. 반면 중국은 브릭스(BRICS+), 상하이협력기구(SCO), 일대일로(BRI)를 통해 나름의 경제권을 확대하고 있으며, 러시아·중동과의 에너지 동맹까지 형성하고 있다. 이와 함께 유럽연합은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하며 미국과는 독립적인 규제 주권을 추구하고 있고, 동남아와 남미 등 비동맹권은 다중 정렬 전략으로 실리를 추구하고 있다.

제도와 전략의 중첩

오늘날의 경제블록은 단순히 제도적 통합과 전략적 정렬 중 하나로만 나뉘지 않는다. 두 요소는 서로 중첩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은 단일시장이라는 제도적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미국과의 공급망 협력이나 대러시아 제재 등에서는 전략적 연합으로 움직인다. 반대로 IPEF나 BRICS 같은 블록은 제도적 구속력은 약하지만, 지정학적 목표를 명확히 공유하며 행동한다.

또한 일부 국가는 다중 블록에 걸쳐 있는 복합적 위치를 가진다. 헝가리, 세르비아, 인도, 인도네시아 같은 국가는 EU·중국·러시아·미국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줄타기를 하며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경제블록은 고정된 협정이 아니라, 기술, 자원, 안보, 가치라는 요소들이 교차하는 다층적 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블록경제의 새로운 정의

이제 경제블록은 단지 관세를 없애는 무역협정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어떤 기술을 통제하고, 어떤 가치에 따라 공급망을 재편하며, 어떤 기준으로 글로벌 질서를 조직할 것인가를 둘러싼 정치경제적 선택의 장이다. 경제블록은 법조문 속 협정에서 시작됐지만, 이제는 반도체, 배터리, 데이터, 탄소, 통화, 안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블록경제란 과거의 ‘무역협정 중심 통합체’를 넘어, 지금은 ‘지정학적 질서 재편의 방식’이자 ‘전략적 정렬의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고전적 자유무역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기술과 가치, 힘의 재배열이라는 훨씬 더 복잡한 질서가 블록의 경계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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