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디지털 달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검토 중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의 일종이다. 기존의 종이 화폐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며,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고 관리하는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현금’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 디지털 달러를 선뜻 도입하지 않고 있다. 기술은 이미 준비단계에 돌입했지만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속도를 늦추는 중이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란 무엇인가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는 기존의 실물 화폐와 동일한 법적 지위를 가지는 디지털 형태의 국가통화다. 신용카드나 전자화폐와 달리, 은행계좌 없이도 누구나 중앙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화폐를 직접 보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 즉, 지갑 대신 스마트폰 앱으로 ‘중앙은행 돈’을 직접 소지하는 개념이다.
CBDC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하나는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소매용 CBDC’, 다른 하나는 금융기관 간 거래를 위한 ‘도매용 CBDC’이다. 디지털 달러는 이 중에서도 소매용 CBDC에 해당하며, 누구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결제수단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
미국의 연구 프로젝트와 기술 기반
미국은 디지털 달러를 단순한 이론이 아닌 실제 프로젝트로 준비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해밀턴 프로젝트(Project Hamilton)’다. 이는 보스턴 연방준비은행과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가 공동으로 수행 중인 기술 연구 프로젝트로, 고속 트랜잭션(=거래) 처리기술과 보안 구조 설계를 중심으로 디지털 달러의 구현 가능성을 검증하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이미 초당 수십만 건의 거래를 처리할 수 있는 성능이 확인되었고, 익명성, 보안성, 이중 지불 방지 등의 기술적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 다시 말해, 미국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사회적 수용의 문제로 인해 도입을 유보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권의 반발: 트럼프와 공화당의 우려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적 논쟁이다. 대표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CBDC 도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디지털 달러는 정부가 국민의 모든 금융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수단이다. 나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 (2024년 1월, 트럼프 캠페인 연설)
공화당은 CBDC가 정부 통제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우려하며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디지털 화폐는 설계상 모든 거래기록이 전자적으로 남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익명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점이 논쟁의 핵심이다.
이와 함께, 민간은행의 역할이 축소될 수 있다는 금융 산업계의 반발도 강하다. 디지털 달러가 도입되면 국민이 중앙은행에 직접 계좌를 개설할 수 있게 되므로, 시중은행의 예금 기반이 위협받을 수 있다.
중국과 세계의 움직임
미국이 주저하는 사이 중국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e-CNY)를 개발하여 주요 도시에서 실사용을 시작했으며,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 중 외국인에게도 한시적으로 개방했다. 디지털 위안은 글로벌 무역에서 달러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바하마는 2020년 ‘샌드 달러(Sand Dollar)’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고, 유럽중앙은행(ECB), 일본은행, 한국은행 등도 파일럿 실험을 활발히 진행 중이다. 한국은 2025년부터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도매용 디지털 화폐의 실거래 테스트에 들어간다.
세계적으로 약 130개국이 CBDC를 연구하거나 개발 중이며, 이들 국가의 GDP는 전 세계의 98%를 차지한다.
미국의 전략은 지연인가, 신중함인가
미국이 디지털 달러 도입을 미루는 이유는 단순한 기술문제 때문이 아니다.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치, 금융시스템의 구조, 정치적 가치 등을 모두 고려한 정치적 결단의 문제다.
디지털 달러가 실현되면 미국은 전 세계 디지털 결제 표준을 선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잘못 설계된 디지털 화폐는 금융 불안을 촉발하고, 프라이버시 논란이나 정치적 반발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의 ‘지연’은 방치가 아니라 전략적 유예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은 기술적 우위를 확보한 상태에서 제도적 합의와 국제적 표준 설정을 주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결론
디지털 달러는 단순한 결제수단의 변화가 아니다. 금융의 미래, 통화 주권, 디지털 감시와 자유의 경계를 가르는 핵심 이슈다. 미국이 왜 주저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단순히 하나의 국가정책을 넘어서 세계 질서의 재편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