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왜 ‘전쟁’의 중심이 되었나
스마트폰, 전기차, 인공지능, 군사 장비까지 ‒ 현대산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반도체는 필수부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반도체는 단순한 부품이 아니라 국가경쟁력과 직결되는 전략자산으로 간주된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반도체 전쟁’은 기술우위를 놓고 벌이는 새로운 형태의 패권경쟁이다.
특히 미국은 반도체 기술에서 중국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본격적인 제재와 통제에 나섰고, 중국은 자체 기술 개발과 생산역량 확대를 통해 대응하고 있다. 이 전선 한가운데에는 한국과 대만, 그리고 유럽의 핵심 기업들이 있다.
미국의 전략: 기술봉쇄와 공급망 통제
미국은 2022년 이후 고성능 반도체와 반도체 장비에 대한 대중국 수출을 제한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슈퍼컴퓨터에 사용되는 GPU, 7nm 이하의 첨단 반도체, 그리고 이를 생산하는 EUV(극자외선) 노광장비가 주요 통제대상이다.
이러한 전략에는 ‘동맹국 중심 공급망 재편’이라는 흐름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은 일본, 네덜란드, 한국, 대만 등과 함께 중국을 배제한 기술동맹을 형성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ASML은 EUV 장비수출을 제한했고, 일본은 핵심 소재 수출을 조절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의 기업들도 미국 압박 속에서 민감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중국의 대응: 기술 굴기와 자립 전략
중국은 반도체 국산화를 국가차원의 과제로 삼고 있다. 화웨이, SMIC(중국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등은 미국 제재에도 불구하고 자체 칩 생산에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7nm 공정 수준의 칩을 독자 생산했다는 보도도 있지만 미국의 기술과 장비 없이 첨단공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중국 정부는 대규모 보조금과 연구개발 투자로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려 하고 있으며, 동시에 러시아·브라질 등과 함께 ‘탈달러·탈미국’ 기술협력도 시도 중이다. 그러나 장비, 소프트웨어, 인재 등 전방위적 기술의존도를 완전히 줄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줄타기 속의 한국과 대만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의 TSMC는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다. 미국의 기술봉쇄정책에 협력하면서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완전히 놓칠 수 없는 구조다. 삼성과 하이닉스는 중국 내 생산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부 장비의 대중국 반입에 대해 미국의 ‘유예 조치’를 받고 있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에 공장을 신설했고, 삼성전자 역시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비용과 인력 문제, 기술 유출 우려 등으로 인해 양국 기업 모두 ‘미·중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민감한 조율이 필요하다.
기술 패권의 미래: 갈등은 계속된다
반도체 전쟁은 단기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AI, 양자컴퓨팅, 자율주행차, 우주산업 등 미래기술은 더 높은 수준의 반도체를 요구하며, 이 분야의 주도권을 잡는 국가가 글로벌 질서에서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동맹 중심의 기술 통제 전략을 강화할 것으로 보이며, 중국은 기술 자립을 위한 장기투자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한국은 기술력 유지뿐 아니라 외교·산업 전략의 정교한 균형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반도체는 이제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전략자산’이며, 그를 둘러싼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