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테리오파지 T4의 원자 수준 구조 모형. 실제 비율로 제작됐다.
By Dr. Victor Padilla-Sanchez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바이러스는 사람이나 동물에게만 감염되는 것이 아니다. 박테리아도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는다. 박테리아를 숙주로 삼는 이러한 바이러스를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 줄여서 ‘파지(phage)’라고 한다.
박테리오파지는 흔히 ‘박테리아를 먹는 바이러스’라고 풀이된다. 그리스어로 ‘먹다’라는 뜻을 지닌 phagein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실제로 박테리아를 먹는 것은 아니다.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그 안에서 증식하는 바이러스다.
박테리아도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파지는 박테리아 표면의 특정 부위에 달라붙은 뒤 자신의 유전물질을 세포 안으로 전달한다. 치료 연구에 주로 이용되는 용균성 파지는 박테리아 내부에서 증식한 다음 세포를 터뜨리고 밖으로 나온다. 이 과정에서 감염된 박테리아는 죽는다

<박테리오파지의 용균성 생활사>
A) 박테리아 표면의 특정 수용체 인식 B) 박테리아 부착 및 유전물질 주입
C) 박테리아 내부에서 새로운 파지 생성 D) 박테리아 세포 파괴 및 새로운 파지 방출
By Bruna Espiño dos Santos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이를 일상적인 표현으로는 박테리아가 바이러스에 걸려 ‘병든다’고 할 수 있다. 과학적으로는 파지가 박테리아를 감염시키고 증식을 방해하거나 파괴한다고 설명하는 편이 정확하다.
특정 박테리아만 공격한다
파지는 숙주 선택성이 매우 높다. 특정한 종이나 균주의 박테리아만 감염시키며, 사람의 세포 안에서는 증식하지 않는다.
항생제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뿐 아니라 몸속의 유익한 세균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 파지는 표적이 되는 박테리아만 선택적으로 제거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감염을 일으킨 균과 맞는 파지를 찾아야 하므로 이러한 선택성이 오히려 치료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항생제 등장으로 밀려난 파지 치료
박테리아를 파괴하는 바이러스의 작용은 영국의 세균학자 프레더릭 트워트(Frederick Twort)가 1915년 처음 보고했다. 1917년에는 펠릭스 데렐(Félix d’Hérelle)이 같은 현상을 독립적으로 발견하고 ‘박테리오파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데렐은 파지를 세균 감염 치료에 이용하려 했다. 실제로 20세기 초에는 파지를 이용한 치료가 여러 곳에서 시도됐다. 그러나 1940년대 이후 사용하기 편하고 효과가 비교적 일정한 항생제가 보급되면서 서유럽과 북미의 파지 연구는 크게 위축됐다.
반면 옛 소련과 동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파지 연구와 치료가 계속됐다.
항생제 내성으로 다시 주목받다
최근에는 항생제가 듣지 않는 내성균이 증가하면서 파지 치료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환자의 감염을 일으킨 박테리아를 확인한 뒤, 그 균을 감염시킬 수 있는 파지를 찾아 치료에 이용하는 방식이다.
세계보건기구는 파지가 항생제 내성균에 대응할 유망한 수단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어떤 감염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적절한 투여량과 방법은 무엇인지 등을 확인할 임상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현재 파지 치료는 항생제를 일반적으로 대체하기보다 기존 치료가 듣지 않는 감염에 사용할 대안이나 보조 수단으로 연구되고 있다.
식품 속 세균을 줄이는 파지
파지는 의료 분야뿐 아니라 식품의 미생물 관리에도 이용된다. 대표적인 대상이 심각한 식품 매개 감염을 일으킬 수 있는 리스테리아 모노사이토제네스(Listeria monocytogenes)다.
미국에서는 특정 리스테리아균을 표적으로 삼는 파지 제제가 안전성 신고 절차를 거쳐 육류와 유제품을 비롯한 여러 식품의 미생물 제어에 사용되고 있다. 살모넬라균이나 병원성 대장균을 대상으로 하는 제제도 개발됐다.
파지는 항생제를 당장 대신할 만능 치료제는 아니다. 치료할 세균과 맞는 파지를 찾아야 하며, 효과와 안전성도 충분히 검증해야 한다. 하지만 항생제 내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는 새로운 치료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