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멈추려는 유럽 – AI Act와 규제의 정치학
2025년 3월, 유럽연합(EU)은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에 대한 포괄적 규제를 담은 법안, AI Act를 최종 확정했다. 이 법은 생성형 AI 모델, 얼굴 인식 기술, 자동화 시스템 등 모든 AI 기술을 위험도에 따라 분류하고 규제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술기업들은 즉각 반응했다. 어떤 이는 “혁신을 막는 족쇄”라고 했고, 어떤 이는 “신뢰할 수 있는 기술 환경의 시작”이라 말했다. 이 법의 통과는 단순한 기술 정책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EU는 왜 AI에 이토록 신중한가? 그리고 이 규제는 앞으로의 세계에 어떤 함의를 남기게 될까?
유럽이 ‘규제’를 선택한 이유
AI Act의 핵심은 위험 기반 접근(risk-based approach)이다. EU는 AI 시스템을 최소위험, 제한위험, 고위험, 금지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AI 채팅 상담은 제한위험, 의료 진단이나 취업 선별 시스템은 고위험, 그리고 사회적 점수 매기기 같은 기술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생성형 AI 모델인 ChatGPT, Gemini, Claude 등은 고위험군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들이 활용되는 상황에 따라 고위험 요소가 발생할 수 있다.
유럽이 이러한 구조를 채택한 배경에는 기술에 대한 통제력보다 ‘가치’의 문제가 있다.
EU는 디지털 규범을 설정할 때마다, 개인 정보 보호, 투명성, 인권을 중심에 둔다. AI Act 역시 같은 철학 위에서 등장했다. EU의 규제는 종종 ‘느리고 까다롭다’는 비판을 받지만, 그 방향성만큼은 일관된다.
기술과 규범의 전선 – 미국, 중국과의 차이
미국은 시장 중심, 자율 규제에 가깝다. OpenAI, Google, Meta 등 빅테크 기업들이 자체 윤리 가이드라인을 운영하며, 정부는 상대적으로 후방에서 원칙을 조율하는 수준이다.
이는 ‘혁신을 우선’하는 시스템이다.
중국은 기술 규제를 강화해왔지만, 그 목적은 통제와 감시, 사회 질서 유지에 가깝다. AI 기술은 국가 전략의 일환이며, 감시체계와 긴밀히 연결된다. 이 틈에서 EU는 제3의 길을 간다.
“사람 중심”, “윤리 기반”, “기술은 수단일 뿐”이라는 규범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는 듯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기술 생태계’를 바탕으로 글로벌 디지털 표준을 선점하려는 전략이다.
누가 규제를 두려워하는가
AI Act가 통과되자, 많은 기업이 반응했다. 특히 OpenAI는 자사의 GPT 모델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고, Meta는 “EU 법안은 기술 진보를 가로막는다”고 비판했다. EU의 해석은 다르다.
“기업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규제가 아니라, 설명해야 하는 책임이다.” 특히 고위험 AI 시스템은 사용 목적, 작동 원리, 데이터 출처까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 조항이야말로 기업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AI Act가 갖는 정치적 의미다. 기술이 투명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만 공공 영역에 들어올 수 있다는 선언.
지금 이 논쟁이 중요한 이유
우리는 이미 AI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단순한 채팅이나 이미지 생성 기능을 넘어서, AI는 의료, 교육, 행정, 군사 등 거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고 있다. 이 상황에서 “AI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EU는 이 질문에 대해 제일 먼저 구조적으로 답을 내린 지역이다. 우리는 이 선택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
정리하며
AI Act는 단순한 기술 규제법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사람을 위하는 기술인가”라는 질문에 유럽이 내놓은 하나의 철학적 응답이다.
기술은 중립이 아니다. 그 기술을 설계하는 사람, 통제하는 구조, 사용되는 사회의 규범에 따라 같은 기술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제 각국은 선택해야 한다. 기술을 믿을 것인가, 사람을 중심에 둘 것인가. 유럽은 먼저, 사람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