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언어를 갖추기 전부터 그림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했다. 어둡고 조용한 동굴 벽면이나 암석 위에 남겨진 그림들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세계와 자신을 인식한 최초의 흔적이자 예술의 기원이다. 유네스코는 이들 중 일부를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세계유산(World Heritage)’으로 지정했다. 다음은 유네스코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여덟 곳이다.
알타미라 (Altamira, 스페인)
2011년 바르셀로나 매머드 박물관(Museo del Mamut)의 복제품 전시
By Thomas Quine – Cave paintings,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1879년,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 인근의 한 동굴에서 고고학자 마르셀리노 산스 데 사우투올라(Marcelino Sanz de Sautuola)와 그의 9살 난 딸 마리아가 우연히 천장에 그려진 들소 무리를 발견했다. 그 그림들은 약 1만 5천 년 전, 마들렌기의 작품으로 적색 안료와 목탄을 이용해 동물의 윤곽과 근육, 움직임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 전에는 ‘선사인은 미개하다’고 믿던 당시 학계에 선사 예술의 존재를 입증한 최초의 증거가 되었으며, 오늘날 알타미라는 유럽 구석기 미술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라스코 (Lascaux, 프랑스)
동굴 벽에 그려진 들소, 말, 그리고 사슴들.
By EU,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1940년, 프랑스 남서부 몽티냐크 근처에서 소년 네 명과 개 한 마리가 우연히 입구를 발견하며 세상에 알려진 라스코 동굴은 약 1만 7천 년 전의 벽화로 가득하다. 벽면 곳곳에는 들소, 사슴, 말, 염소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사냥 장면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역동적으로 맞서고 있다.
정교한 형태, 깊이감 있는 구성, 그리고 색의 조화로 인해 라스코는 흔히 “선사시대의 시스티나 성당”이라 불린다. 이곳은 단순한 장식이 아닌, 신화적 세계관과 사냥의 의례를 담은 예술 공간이다.
쇼베(Chauvet, 프랑스)
오리냐시앙기(Aurignacian, 약 31,000년 전)의 말·코뿔소·들소 장면
By Thomas T.,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1994년,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 지방의 석회암 지대에서 연구자 장-마리 쇼베(Jean-Marie Chauvet)가 발견한 이 동굴은 3만 2천 년 전,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회화 유적 중 하나다. 벽면에는 사자, 코뿔소, 곰, 말 등 다양한 동물이 등장하며, 특히 겹쳐 그린 선과 음영 처리를 통해 움직임과 원근이 표현되어 있다.
이 놀라운 표현력은 예술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관찰·상상·추상의 결합임을 보여준다. 쇼베 동굴은 인류 창조력의 기원을 증언하는 ‘시간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쿠에바 데 라스 마노스 (Cueva de las Manos,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핀투라스 강 협곡의 쿠에바 데 라스 마노스 동굴 벽화
By Pablo A. Gimenez from Argentina,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남미 파타고니아의 핀투라스 강 계곡 절벽 속에는 수백 개의 손자국 실루엣이 겹겹이 새겨져 있다. 이곳의 그림은 약 1만 3천 년에서 9천 년 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부드럽게 분사한 안료를 통해 벽면에 손의 음영을 남기는 기법을 사용했다.
대부분 왼손자국인 이유는, 오른손으로 안료를 뿌렸기 때문이다. 이 손자국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흔적, 무리의 상징, 그리고 정체성의 선언이었다. 벽면에는 사냥 장면과 기하학적 무늬도 함께 남아, 초기 인류의 공동체적 삶을 생생히 보여준다.
카카두 국립공원 (Kakadu National Park, 호주)
호주 카카두 국립공원 안반방 바위 보호소의 암각화
By Dietmar Rabich,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호주 북부 준주의 카카두 국립공원은 약 2만 년 전부터 원주민이 거주하며 남긴 수천 점의 암각화로 가득하다. 이곳의 대표적인 양식은 ‘엑스레이 아트(X-ray Art)’로, 사람과 동물의 외형뿐 아니라 내장과 뼈 구조까지 함께 묘사되어 있다.
이 독특한 표현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 생명에 대한 영적 이해와 우주관을 담고 있다. 카카두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했던 아보리진 문화의 살아 있는 기록이다.
세하 다 카피바라 (Serra da Capivara, 브라질)
브라질 세하 다 카피바라 국립공원의 암벽화
By Diego Rego Monteiro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브라질 북동부의 이 국립공원에는 붉은 안료로 그려진 수백 점의 벽화가 절벽마다 펼쳐져 있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약 1만 2천 년 전에 그려졌으며, 사냥꾼들이 활을 쏘고, 춤을 추고, 동물을 포획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예술 활동 중 하나로, 신대륙 원주민의 정신세계와 공동체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빔베트카 암각화(Bhimbetka, 인도)
공동체의 사냥과 의식 장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빕베트카 암각화
By Amigo&oscar – Own work,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인도 중부의 암반 지대에는 붉은색, 흰색, 초록색, 갈색, 검정색 등 다양한 색으로 동물, 인간, 사냥과 춤의 장면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약 1만 년 전에 그려진 이 벽화들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예술로 평가된다.
특히 색의 조화와 리듬감 있는 구성은 그림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공동체의 이야기와 의례의 도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발 카모니카 (Val Camonica, 이탈리아)
가운데에 ‘상징’을 두고 결투 중인 한 쌍의 인물을 묘사한 암각화.
By Luca Giarelli, CC-BY-SA 3.0, wikimedia commons.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 지방의 협곡에는 기원전 5천 년경부터 시작된 수천 점의 암각화가 남아 있다. 사람과 동물, 전쟁과 사냥 장면이 이어지며, 특히 두 팔을 들어 기도하는 듯한 ‘오란테(Oranti)’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종교적 신앙과 제의적 행동을 표현한 것으로, 유럽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발 카모니카는 유럽 선사 미술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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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덟 곳의 선사 예술 유적은 각기 다른 대륙과 문화 속에서 태어났지만,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했다. 벽면의 그림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사유와 감정, 신앙과 상징이 결합된 인류 최초의 언어였다.
유네스코는 이 유적들을 통해 “예술은 문명 이전부터 인간의 본성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