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브 극장(The Globe Theatre) – 셰익스피어의 무대

글로브 하우스 외부

셰익스피어 글로브 – 문화재(등재 건물) 번호 1012806의 사진

By Jwslubbock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탄생과 배경

엘리자베스 시대의 런던, 템스강 남쪽 뱅크사이드(Bankside)는 연극과 오락 문화가 활발하게 꽃피던 지역이었다. 1599년, 배우이자 극장주였던 리처드 버베지(Richard Burbage)와 그의 형제 커스버트(Cuthbert)는 쇼어디치(Shoreditch)에 있던 ‘더 시어터(The Theatre)’의 목재를 해체해 템스강 남쪽으로 옮겼다.

이 재활용 목재로 세워진 새로운 원형 공연장이 바로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이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극작가이자 배우였을 뿐 아니라 이 극장의 공동 소유주였다. 이곳은 곧 그가 속한 극단 로드 챔벌린스 멘(Lord Chamberlain’s Men)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셰익스피어의 많은 대표작이 이 무대에서 처음 선보였다.

전성기와 명작

글로브 극장은 개관하자마자 런던의 문화 중심지로 떠올랐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개관 무대는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였으며, 이후 리처드 2세(Richard II),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겨울 이야기(A Winter’s Tale) 등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이 무대에 올랐다.

수용 인원은 약 3,000명에 달했으며, 무대 바로 앞의 ‘피트(pit)’라 불리는 구역은 입석으로 운영돼 저렴한 가격에 관람할 수 있었다. 상류층과 귀족들은 극장 내부 벽면을 따라 설치된 계단식 좌석에서 보다 쾌적하게 공연을 즐겼다. 이 구조 덕분에 글로브는 당시 런던에서 가장 활기찬 공연장이 되었다.

비극과 재건

그러나 1613년 6월 29일, 헨리 8세(Henry VIII) 공연 중 발사된 소품용 대포가 불운하게도 지붕의 이엉과 목재 구조물을 태우며 큰 화재로 번졌다. 건물은 전소되었지만 극장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듬해인 1614년, 원래의 기초 위에 재건된 글로브 극장이 다시 관객을 맞이했고, 셰익스피어 사후에도 많은 극단의 주요 무대로 사용되었다.

몰락과 사라짐

셰익스피어가 세상을 떠난 1616년 이후에도 극장은 계속 운영됐지만, 1642년 청교도 혁명기(영국 내전) 동안 의회가 모든 연극 공연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면서 문을 닫았다. 이어 1644년, 청교도의 명령에 따라 건물이 완전히 철거되고 그 자리는 주택지로 바뀌었다. 한 세기를 풍미한 무대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대의 부활

글로브 하우스 무대

런던, 셰익스피어 글로브 무대

By Ank Kumar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그러나 셰익스피어와 글로브의 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 출신 배우이자 감독인 샘 와너메이커(Sam Wanamaker)의 주도로, 20세기 후반 글로브 극장의 복원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고증을 통해 당시의 건축 방식과 재료가 최대한 재현되었으며, 100% 영국산 참나무와 ‘장부맞춤(mortise and tenon)’ 기법이 사용됐다. 지붕은 런던 대화재 이후 처음으로 허가된 이엉 지붕으로 덮였고, 무대 앞 피트 구역도 입석으로 유지하되 바닥만 현대적으로 콘크리트로 바꿨다.

글로브 하우스 공연

공연중인 셰익스피어 글로브 무대

By The Globe by Richard Croft,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1997년, ‘셰익스피어스 글로브(Shakespeare’s Globe)’라는 이름으로 원래 자리에서 약 230미터 떨어진 곳에 문을 연 이 극장은, 오늘날까지 셰익스피어 작품을 중심으로 공연을 이어가며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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