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계단, 프랑스 외교관의 유증이 만든 로마 명소

스페인 계단 원경

로마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 중 하나가 스페인 계단(Spanish Steps)이다. 이름만 들으면 스페인에 있을 것 같지만 이 계단은 로마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계단이 프랑스 외교관의 유증으로 지어졌고, 완공 후에는 스페인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름의 유래 – 스페인 광장에서 비롯되다

17세기, 지금의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에는 스페인 대사관이 들어섰다. 이곳은 외교관, 여행객, 예술가들이 모이는 사교의 중심지였고, 자연스럽게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이 굳어졌다. 이후 광장과 언덕 위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à dei Monti) 성당을 연결하는 계단이 완성되자, 계단도 광장의 이름을 따라 ‘스페인 계단’이 되었다.

건설 배경 – 수십 년 논쟁과 프랑스 외교관의 유증

스페인 광장과 프랑스 소유 성당 사이의 경사면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두고 수십 년간 논쟁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프랑스 외교관 에티엔 게피에르(Étienne Gueffier)가 1660년에 남긴 유증이 계단 건설 자금의 토대가 되었다.

원래 설계에는 계단 꼭대기에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기마상을 세우려는 계획이 포함돼 있었으나, 교황의 반대와 유증에 대한 법적 이의제기로 공사가 중단됐다. 결국 교황청과 프랑스가 타협을 이뤘고, 1723~1725년 프란체스코 데 산티스(Francesco de Sanctis)와 알레산드로 스페키(Alessandro Specchi)가 설계를 맡아 오늘날의 스페인 계단이 완성됐다.

건축 속의 절충과 상징

스페인 광장 근경

스페인 계단은 총 13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완만한 곡선과 테라스 구조가 특징이다. 계단에는 타협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부르봉 왕가의 백합 문양과, 교황 인노첸시오 13세를 나타내는 체크무늬 독수리 문장이 함께 조각돼 있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스페인 광장과 바르카차 분수(Fontana della Barcaccia)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 분수는 1629년 완공된 것으로, 건축가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가 설계했다. 1598년 티베르 강 범람 후 발견된 평저선에서 영감을 얻어 ‘낡은 배의 분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화와 예술 속 스페인 계단

18~19세기, 스페인 계단은 부유층, 예술가, 보헤미안들이 모이는 사교의 중심지였다. 스페인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오른쪽 첫 건물(위 사진 오른쪽 밝은 건물)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가 생애 마지막 몇 달을 보낸 집으로, 현재는 키츠(John Keats)와  셸리(Percy Bysshe Shelley) 등의 작품과 유품을 전시하는 ‘키츠-셸리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스페인 계단의 낭만적인 분위기는 수많은 예술가와 영화 제작자에게 영감을 주었고, 특히 영화 <로마의 휴일>(1953)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를 먹던 장면은 세계적인 명장면으로 남았다.

계절별 풍경과 오늘날의 모습

스페인 계단은 사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특히 5월에는 분홍빛 아잘레아 화분이 계단을 가득 채워 장관을 이룬다. 주변에는 카페와 꽃집이 즐비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좋다.

과거에는 많은 여행객이 계단에 앉아 휴식을 즐겼지만, 2019년부터는 문화재 보존과 안전을 위해 계단 위에 앉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대신 스페인 광장과 비아 데이 콘도티(Via dei Condotti)를 거닐며 쇼핑과 카페 문화를 즐길 수 있다.

특히, 광장 근처에는 1760년 개업한 로마의 명물 카페 ‘카페 그레코(Caffè Greco)’가 있어 역사적인 여행 코스로 묶기 좋다.

카페 그레코

로마의 명물, 카페 그레코(Caffè Greco)

By DIMSFIKAS,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여행 팁
여유롭게 스페인 계단을 즐기고 싶다면 아침 일찍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 시간대에는 거의 사람이 없어 계단 전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봄에는 화려한 꽃축제가 열려 계단이 장식되고, 여름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인파로 활기가 넘친다. 가을과 겨울에는 비교적 한적해져, 야경 속에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추천 동선은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에서 시작해 계단을 내려와 스페인 광장 분수를 감상하고, 비아 데이 콘도티 거리를 거쳐 카페 그레코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 이름과 역사가 만든 매력

스페인 계단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로마라는 세 문화가 맞닿은 상징적 공간이다. 건설 배경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나면, 계단을 오르내리며 바라보는 풍경이 단순한 관광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계단 오른편의 ‘키츠-셸리 기념관’까지 더해져, 이곳은 역사와 문학이 함께 숨 쉬는 장소가 된다. 로마를 방문한다면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삼중의 아이덴티티를 꼭 경험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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