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익숙해진 단어, 어느 순간 멍해진다
“apple(애플), apple, apple, apple…”
처음에는 빨갛고 반질반질한 사과 하나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러나 반복이 이어질수록 그 이미지는 점점 흐려지고, 어느 순간 ‘apple’이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도 담지 못한 공허한 소리로만 울린다.
그 순간 단어와 사물을 잇는 연결이 끊기고, 우리는 언어가 본래부터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하나의 단어를 반복할 때 그 의미가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단지 음성 자극으로만 인식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의미포화(Semantic Satiation)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언어가 기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기호가 ‘apple(애플)’이라는 소리(소리의 형상)와 빨갛고 먹을 수 있는 과일(의미 내용)이 임의로 연결된 것임을, 일상의 한순간에 낯설게 드러내는 체험이다.
언어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능력 ‒ 소리와 의미를 연결하는 힘 ‒ 은 반복이라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너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리하여 남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아닌 기계적인 음절의 메아리뿐이다.
단어가 ‘말’이 아닌 ‘소리’가 되는 순간
언어란 뇌가 특정한 소리를 의미와 연결하면서 형성되는 체계다. 평소에는 이 연결이 너무도 매끄럽고 자동적이어서 단어를 듣는 순간 의미가 곧장 떠오른다. 하지만 반복은 이 연결을 일시적으로 끊어놓는다.
처음에는 분명 “apple”이라는 단어를 들었지만 서른 번쯤 되면 머릿속에서는 이미지가 흐려지고 “apple”이라는 소리만이 기계처럼 반복된다. 이는 뇌가 같은 자극에 적응하면서 의미처리를 잠시 중단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단지 감각적인 착각이 아니라 심리언어학적으로도 뚜렷이 입증된 인지반응이다.
학문적 배경과 실험적 증거
‘의미포화’라는 용어는 1962년, 캐나다 출신 심리학자 리언 제임스(Leon Jakobovits James)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그는 실험 참가자에게 특정 단어를 반복하게 하고, 그 단어의 의미인식 속도나 판단 정확도가 반복 이후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실험이 이어졌는데, 연구자들은 의미포화 현상을 유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선택하였다. 흔히 사용된 예로는 ‘apple’, ‘chair’, ‘window’ 같은 구체적이고 친숙한 명사들이 있다. 이런 단어들은 별도의 설명 없이도 즉각적으로 이미지화되는 특성을 지닌다.
또한 ‘truth’, ‘idea’, ‘belief’처럼 감각적 경험에 직접 연결되지 않는 추상어들도 실험에 자주 등장했다. 이들은 의미보다 언어 구조에 대한 인지 반응을 관찰하기에 적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반복 횟수는 보통 20~40회이며, 이후 단어를 인식하거나 구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유의미하게 늘어났다. 현대의 신경심리학 연구에서는 fMRI나 EEG를 통해, 반복 자극 후 뇌의 의미처리 영역(좌측 측두엽 등)의 활동이 실제로 감소한다는 결과도 확인되었다.
우리가 경험하는 ‘작은 멍함’의 순간
이 현상은 실험실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이거”, “그냥”, “지금”, “바로” 같은 단어를 무심코 반복하다가 문득 “이게 원래 무슨 말이었더라?” 하고 멍해지는 순간, 뇌는 잠시 그 단어를 ‘의미 있는 기호’가 아닌 ‘낯선 소리’로 듣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언제나 의미를 품고 있지만, 반복은 그 의미를 흐릿하게 만들고, 우리는 너무 익숙한 단어들 속에서 잠깐씩 언어의 본질과 마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