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의 값어치
책은 단순한 종이와 잉크의 조합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어떤 책은 그 안에 담긴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무게 때문에 고가의 미술품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다. 경매장에서 희귀한 고서나 사본이 수천만 달러에 거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한 권의 성경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책이라는 기록을 새로 쓰며 주목을 받았다. 그 이전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천재의 일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순 성경(Sassoon Codex)과 코덱스 레스터(Codex Leicester), 이 두 권의 책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공통적으로 인류가 남긴 정신적 유산의 정수를 보여준다.
신앙의 증거 – 사순 성경
「사순 1053」 사본의 예시 페이지 스캔 이미지
By Ardon Bar-Hama,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2023년 5월, 소더비 경매장에서 9세기 말 제작된 히브리어 성경 한 권이 3,810만 달러(약 4,953억 원)에 팔렸다. 바로 사순 성경(Sassoon Codex)이다. 현존하는 히브리어 성경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춘 이 사본은 그 자체로 유대교 신앙의 뿌리를 증명하는 역사적 기록물이다.
이 책의 구매자는 미국인 변호사 알프레드 모지스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 소유로 간직하지 않고,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아누 박물관(Anu Museum)에 기증했다. 성경이라는 종교적 상징물이 특정 개인의 소장품이 아닌, 공동체와 인류 전체가 공유해야 할 문화유산임을 강조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사순 성경은 단순히 오래된 책이 아니다. 디아스포라와 종교적 박해, 망명 속에서도 지켜온 유대인 공동체의 끈질긴 신앙과 역사적 정체성의 증거다. 수천만 달러라는 가격은 종이와 잉크에 붙은 값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천 년의 무게를 반영한다.
천재의 사유 – 코덱스 레스터
코덱스 레스터, 해머 2A – 제35권 뒤쪽 면(왼쪽)과 제2권 앞쪽 면(오른쪽)
By Leonardo da Vinci,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사순 성경 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책으로 기록된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 노트였다. 코덱스 레스터(Codex Leicester)는 1506년에서 1510년 사이에 작성된 일기 형식의 원고로, 물의 흐름, 천문학, 지질학 등 자연 세계에 대한 다 빈치의 집요한 관찰과 사유가 가득하다.
이 원고는 1994년,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가 3,080만 달러에 구입하며 화제를 모았다. 현재의 인플레이션을 반영하면 이 금액은 약 6,500만 달러에 해당한다. 단순히 경매 기록만 본다면, 여전히 코덱스 레스터가 사순 성경보다 비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격을 떠나 코덱스 레스터의 가치는 다 빈치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르네상스 천재의 두뇌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는 회화, 공학, 해부학, 수학을 넘나들며 시대를 앞선 통찰을 남겼고, 이 원고는 그러한 지적 모험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 기록물이다.
마무리하며
한 권은 신앙의 유산, 다른 한 권은 지성의 산물이다. 사순 성경과 코덱스 레스터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태어났지만, 공통적으로 인류가 쌓아온 전통과 사유가 단순히 지식의 차원을 넘어 문화적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책의 값어치는 단순히 오래되었거나 희귀하다고 해서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역사가 인류 전체의 기억과 연결될 때, 한 권의 책은 미술품이나 보석 못지않은 가치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