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 언어와 인지적 확장: 말의 구조가 사고를 바꿀까?

다중 언어 능력자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조직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하는 연구가 2015년 영국의 랭커스터대학교(Lancaster University) 연구팀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언어가 사고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험으로 검증했다.

연구 설계 방식

연구팀은 독일어–영어 이중언어자를 대상으로 두 가지 조건을 마련해 실험을 설계했다. 먼저 영어 사용 환경과 독일어 사용 환경을 각각 설정한 뒤, 두 맥락에서 동일한 움직임 사건(motion events)을 제시해 피험자들이 장면을 분류하는 기준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비교했다.

이어서 언어 간섭 조건을 추가해, 영어로 간섭을 받은 상태에서는 독일어식 분류가 나타나는지, 반대로 독일어로 간섭을 받은 상태에서는 영어식 분류가 나타나는지를 살폈다. 이러한 설계는 언어가 달라질 때 인지적 분류 기준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정밀하게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언어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

흥미롭게도 독일어 사용 맥락에서는 움직임 사건을 볼 때 그 동작이 완결 시점(end point)에 도달하는지, 다시 말해 장면 속 이동이 완전히 끝나는가를 기준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반면 영어 사용 맥락에서는 이러한 완결 시점 중심의 판단이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었다.

두 집단 모두 내부적으로는 일관된 해석을 보였지만, 서로 비교했을 때는 동작의 완결 시점(end point)에 대한 주의 정도가 분명하게 달랐다. 이는 언어가 어떤 요소에 시선을 두게 만드는지, 그리고 사건을 조직하는 방식에 미묘한 차이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중언어, 두 개의 인지 모드

가장 흥미로운 결과는 이중언어 사용자에게서 나타났다. 이들은 동일한 영상을 보면서도 상황에 따라 두 언어가 제공하는 관점을 자연스럽게 오갔다. 이 전환은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이 아니라, 언어가 바뀌는 순간 그 언어가 가진 인지 틀이 거의 자동적으로 활성화되는 방식에 가까웠다.

하나의 사건을 해석할 때 영어 화자의 방식으로 사고했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독일어 화자의 관점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단순한 언어 능력이 아니라, 인지적 도구 상자가 두 배로 확장된 것에 가깝다.

다중언어의 사고 확장성

이 연구는 언어가 세계 인식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특히 두 개 이상의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경우, 하나의 상황을 해석하는 관점이 다양해지고 문제 해결 과정이 유연해진다. 현실에서도, 직업적 환경에서도, 더 넓은 사고 범위를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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