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판타지아(hyperphantasia): 현실처럼 느껴지는 상상

하이퍼판타지아 이미지

현실처럼 느껴지는 상상

하이퍼판타지아(hyperphantasia)는 머릿속에서 떠올린 이미지가 실제와 거의 구분되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재현되는 심상(mental imagery) 상태를 말한다. 이는 단순히 ‘상상이 풍부한 사람’을 넘어, 뇌 속의 감각 체계가 실제 자극처럼 활성화되는 독특한 인지 경험이다.

눈을 감고 장미를 떠올릴 때, 단순히 ‘붉은 꽃’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빛의 반사, 꽃잎의 질감, 바람의 움직임까지 느껴진다면, 그것이 바로 하이퍼판타지아의 세계다. 이들은 생각하는 것이 곧 ‘보는 것’이며, 상상은 하나의 감각적 사건처럼 다가온다.

뇌 속에서의 재현

신경과학(neuroscience) 연구에 따르면, 하이퍼판타지아를 가진 사람은 상상을 할 때 시각 피질(visual cortex)이 실제로 무언가를 볼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활성화된다. 즉, 그들의 상상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감각기관의 반응을 모사하는 내적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이러한 재현 능력은 시각적 생생함의 개인차로 설명된다. 하이퍼판타지아를 가진 사람은 뇌의 감각 피질(sensory cortex)과 연합 영역(association areas) 간의 협응이 매우 활발하며, 이 덕분에 상상이 실제 지각(perception)에 근접한 형태로 구현된다.

갤튼에서 제먼까지

‘상상력의 생생함’에 개인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주목받아 왔다. 1880년, 영국의 과학자 프랜시스 갤튼(Francis Galton)은 사람들에게 아침 식사를 떠올려보라고 요청하는 설문을 실시해, 각자가 마음속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처음으로 기록했다. 어떤 사람은 장면을 실제처럼 그렸지만, 어떤 사람은 거의 아무 이미지도 떠올리지 못했다. 이 연구는 인간 상상력의 개별성을 과학적으로 탐구한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데이비드 마크스(David Marks)가 심상의 생생함을 정량화하는 VVIQ(Visual Vividness of Imagery Questionnaire)를 고안하면서, ‘이미저리(imagery)’라는 개념이 심리학 연구의 핵심 주제로 자리 잡았다.

21세기에 들어, 신경학자 애덤 제먼(Adam Zeman)은 상상할 때 시각 피질이 거의 활성화되지 않는 뇌 손상 사례를 보고했다. 그는 이러한 특성을 아판타지아(Aphantasia)라 명명했다. 이후 이 사례가 과학 잡지 《디스커버(Discover)》에 소개되자 같은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잇따라 자신들의 사례를 알려왔다.

이와는 정반대로, 머릿속 이미지가 지나치게 생생해 오히려 감정적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먼은 2020년 연구에서 이러한 특성을 하이퍼판타지아(Hyperphantasia)라 정의하며, 인간 상상력의 스펙트럼이 생각보다 훨씬 넓고 다양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감각의 확장

하이퍼판타지아는 시각적 상상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청각적 이미지, 촉각적 기억, 심지어 후각적 심상(olfactory imagery)까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특정한 장소를 떠올릴 때, 그 공간의 냄새, 소리, 온도, 질감이 모두 함께 재생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이퍼판타지아는 감각 통합적 성격을 띠며, 뇌 속에서 다중감각적 재현(multisensory reactivation)이 이루어진다.

창작과 몰입의 원동력

하이퍼판타지아_브레인 필름 이미지

하이퍼판타지아는 예술가, 작가, 영화감독, 디자이너 등 창의적 직업군에게 강력한 도구가 된다. 생생한 심상 덕분에 이들은 아이디어를 개념이 아닌 장면으로 구상하고, 감정의 결을 색채와 움직임으로 번역할 수 있다.

문학적 상상력이나 시각적 구상력뿐 아니라, 감정적 몰입 또한 깊어, 인물이나 상황을 실제처럼 ‘경험’하며 창작에 반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강렬한 내적 세계는 때로 피로감을 주거나, 원치 않는 이미지나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감정적 부하를 유발하기도 한다. 하이퍼판타지아는 축복인 동시에 감각의 과잉으로 인한 도전이기도 하다.

인간 인지의 스펙트럼

하이퍼판타지아는 인간의 인지 경험이 얼마나 다층적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세계를 바라보지만, 머릿속에서 그리는 세계는 각자 다르다. 누군가는 흐릿한 개념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빛과 질감, 온도와 감정까지 갖춘 장면으로 재현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상상력의 정도가 아니라, 뇌가 세계를 복제하는 방식의 다양성을 드러낸다. 하이퍼판타지아는 인간 마음속의 또 다른 현실이며, 상상이라는 행위가 지각과 경험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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