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를 믿은 남자, 슐리만은 어떻게 트로이를 찾았나

19세기 중반까지 트로이는 역사와 전설의 경계에 놓인 도시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트로이 전쟁을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였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트로이를 호메로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도시로 보는 학자도 많았다. 트로이가 실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가난한 점원에서 부유한 사업가로

독일 출신 사업가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은 트로이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잊힌 청동기시대의 기억을 담은 기록으로 읽었다.

독일 태생의 사업가이자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초상화(1883)년

독일 출신의 사업가이자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 1883년

By S. Kohn,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슐리만은 1822년 독일 북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는 어린 나이에 상점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무역회사에 취직했고,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1846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독립 무역상으로 성장했다. 인디고를 비롯한 염료와 원료를 수입·판매했으며, 크림전쟁 기간에는 초석·황·납 등 화약과 군수품 생산에 사용되는 물자를 거래해 큰 이익을 얻었다.

1851년에는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로 건너갔다. 직접 금을 캐기보다는 광부들이 가져온 사금을 사들여 되파는 금융·중개업을 운영했다. 그는 미국에서 약 1년간 사업한 뒤 러시아로 돌아가 무역을 계속했고, 마흔 살 무렵에는 평생 발굴 비용을 스스로 댈 수 있을 만큼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사업에서 물러난 슐리만은 오랫동안 관심을 품어 온 고대 그리스 세계로 눈을 돌렸다. 그는 사업으로 모은 재산을 바탕으로 호메로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일리아스》를 지리 안내서처럼 읽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 전체가 아니라 전쟁 마지막 해의 짧은 기간을 다룬 서사시다. 신과 영웅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그 안에는 도시 주변의 평야와 강, 바다와 산에 관한 묘사도 들어 있다.

슐리만은 이러한 표현을 실제 지형과 비교했다. 그는 먼저 당시 트로이의 유력한 후보지였던 부나르바시, 오늘날의 프나르바시(Pınarbaşı)를 조사했다. 그러나 그곳은 해안에서 너무 멀고 지형도 호메로스의 묘사와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고대 도시 트로이의 유적 (튀르키예 히사를르크 언덕)

고대 도시 트로이의 유적으로 확인된 튀르키예 히사를르크 언덕

By Barrowbob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1868년 슐리만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영국계 영사관 관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 프랭크 캘버트(Frank Calvert)를 만났다. 캘버트는 이미 히사를르크(Hisarlık) 언덕 일부를 소유하고 그곳에서 소규모 발굴을 진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히사를르크가 고대 트로이의 터라고 확신했고,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던 슐리만에게 이곳을 발굴하도록 권했다.

따라서 슐리만이 《일리아스》만 들고 혼자 트로이의 위치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는 정확하지 않다. 호메로스에 대한 그의 믿음과 막대한 자금이 대규모 발굴을 가능하게 했지만, 히사를르크를 트로이의 유력한 후보지로 보고 슐리만보다 먼저 조사와 발굴을 진행한 사람은 캘버트였다. 대영박물관의 트로이 발굴 해설

히사를르크 언덕 아래에서 나온 도시들

슐리만은 1870년 히사를르크에서 시험적인 발굴을 시작했다. 이 작업에는 아직 오스만 제국의 정식 허가가 없었다. 이후 허가를 받아 1871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다.

현재 튀르키예 차나칼레주에 속하는 히사를르크는 다르다넬스 해협 남쪽 입구에서 약 4.8킬로미터 떨어진 언덕이다. 해협과 에게해를 오가는 길목을 내려다볼 수 있어 교역과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다.

고대 도시 트로이가 자리했던 튀르키예 히사를르크의 유적

고대 도시 트로이가 자리했던 튀르키예 히사를르크의 유적

By Kızıldeniz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땅을 파자 성벽과 건물의 기초, 도기와 각종 생활용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언덕 아래에 묻혀 있던 것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히사를르크에서는 도시가 파괴된 뒤 그 위에 새로운 도시가 세워지는 일이 수천 년 동안 반복되었다. 후대의 조사에서 이 유적은 트로이 제1층부터 제9층까지 구분되었으며, 각 층 안에서도 여러 건축 단계가 확인되었다.

트로이는 약 4천 년에 걸친 정착의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아나톨리아와 에게해·발칸·지중해 세계의 교류를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99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프리아모스의 보물’을 발견하다

1873년 슐리만은 금제 머리 장식과 귀걸이, 목걸이, 금·은제 그릇과 무기 등으로 이루어진 대량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것을 트로이 전쟁 당시 프리아모스 왕이 숨긴 보물이라고 생각해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이름 붙였다.

베를린의 노이에스박물관에 전시된 ‘프리아모스의 보물’ 관식과 목걸이. 장신구 복제품.

베를린 노이에스박물관에 전시된 ‘프리아모스의 보물’ 관식과 목걸이 복제품

By Jean-Pierre Dalbéra from Paris, CC BY 2.0, wikimedia commons.

슐리만은 일꾼들을 돌려보낸 뒤 아내 소피아와 함께 보물을 꺼냈으며, 소피아의 숄에 유물을 싸서 옮겼다고 기록했다. 소피아가 보물의 장신구를 착용한 유명한 사진도 남아 있다.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불리는 황금 장신구를 착용한 슐리만의 아내 소피아 슐리만의 모습.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불리는 황금 장신구를 착용한 아내 소피아 슐리만

By Unknown author,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그러나 보물이 발견되었다는 날 소피아는 아테네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슐리만이 보물을 극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여러 장소에서 나온 유물을 하나의 발견물처럼 구성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는 오스만 당국에 발견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보물을 그리스로 반출했다. 이에 오스만 정부가 슐리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그의 발굴 허가도 취소되었다. 이후 배상과 협상을 거쳐 그는 히사를르크에서 발굴을 재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슐리만이 보물을 발견한 트로이 제2층은 기원전 3천년기의 도시였다. 일반적으로 트로이 전쟁의 배경으로 거론되는 기원전 13~12세기보다 천 년 이상 앞선다. 따라서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는 이름과 달리 이 유물들은 호메로스가 묘사한 프리아모스 왕과 관계가 없다.

트로이를 찾으려다 트로이를 파괴하다

슐리만은 가장 오래된 도시가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덕 중심부에 넓고 깊은 참호를 파고 위쪽의 후기 유적층을 빠르게 걷어냈다. 오늘날 ‘슐리만의 참호’(Schliemann’s Trench)라고 불리는 이 흔적은 지금도 유적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다.

트로이 유적 중앙을 가로지르는 ‘슐리만의 참호’

트로이 유적 중앙을 가로지르는 ‘슐리만의 참호’

By Dosseman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이 과정에서 후기 청동기시대의 건축물과 유물이 훼손되었고, 유물이 어느 층과 장소에서 나왔는지를 밝혀 줄 고고학적 맥락도 상당 부분 사라졌다. 당시 고고학이 아직 체계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기 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초기 발굴은 지나치게 성급하고 파괴적이었다.

슐리만도 후기 발굴에서는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빌헬름 되르프펠트와 협력하면서 지층을 구분하는 일의 중요성을 점차 받아들였다. 이후 되르프펠트와 칼 블레겐을 비롯한 고고학자들이 조사를 이어가면서 트로이의 복잡한 역사가 밝혀졌다.

현재 호메로스의 이야기에 역사적 배경이 있다면,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도시로 지목한 제2층보다는 후기 청동기시대의 트로이 제6층 후기 또는 제7a층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어느 층도 《일리아스》에 묘사된 전쟁과 직접 연결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미케네에서 발견한 황금

슐리만의 발굴은 트로이에서 끝나지 않았다. 1876년 그는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무덤을 찾겠다며 그리스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미케네를 발굴했다. 미케네의 위치는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슐리만은 고대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을 근거로 왕족의 무덤이 성벽 안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가멤논의 가면’, 기원전 16세기경.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이른바 ‘아가멤논의 가면’, 기원전 16세기경.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By Gautier Poupeau – Own work,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발굴 결과 성벽 안의 수직갱 무덤에서 여러 사람의 유골과 다량의 황금 부장품이 발견되었다. 슐리만은 그중 한 황금 가면을 아가멤논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아가멤논의 가면’으로 불리는 유물이다. 그러나 이 가면은 기원전 16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트로이 전쟁의 배경으로 추정되는 시대보다 약 300~400년 앞선다.

트로이를 발견한 사람인가, 파괴한 사람인가

슐리만을 단순히 ‘트로이를 발견한 영웅’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히사를르크를 먼저 조사하고 슐리만을 그곳으로 이끈 프랭크 캘버트의 공로가 오랫동안 그의 명성에 가려졌으며, ‘프리아모스의 보물’의 발견 과정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 성급한 발굴로 중요한 유적을 파괴했다는 비판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를 유적을 파괴한 무모한 아마추어로만 평가할 수도 없다. 그는 사업으로 모은 재산을 대규모 발굴에 투입했고, 조사 결과를 책과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렸다. 그의 발굴은 트로이와 미케네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에게해 청동기문명을 역사 연구의 중요한 영역으로 끌어냈다.

슐리만이 찾아낸 것은 《일리아스》에 묘사된 영웅들의 세계 그 자체가 아니었다. 히사를르크의 유적은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역사적 기억을 어느 정도 담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트로이 전쟁의 실재를 직접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현실의 땅과 연결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고고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슐리만의 이야기는 위대한 발견담인 동시에, 강한 믿음이 새로운 세계를 열기도 하지만 증거보다 앞서 나갈 때는 진실을 왜곡하고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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