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그마 (뉴올리언스 제2차 세계대전 국립박물관)
By ironypoisoning,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암호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은 무기의 전쟁이자 정보의 전쟁이었다. 작전 계획을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전투의 승패와 직결되었고, 적군의 수중에 들어간 정보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독일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니그마(Enigma) 암호기를 사용했다. 이름 그대로, 이 장치는 당시 연합군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았다.
에니그마란 무엇인가
‘에니그마(Enigma)’는 고대 그리스어 ainigma(αἴνιγμα)에서 유래했다. 불가해한 문제를 뜻하는 이 단어는 기계의 복잡한 작동 원리에도 잘 맞아떨어졌다.
에니그마는 전기기계식 암호기로, 입력된 글자를 다른 글자로 치환하여 무의미한 암호문을 만들어냈다. 한 글자가 최종 출력되기까지 아주 복잡한 암호화 과정을 거쳤고, 매일 달라지는 설정 때문에 일정한 규칙을 발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독일 에니그마 암호기의 로터 표본
By USAF,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특히 로터(rotor)의 역할이 중요했다. 플러그보드에서 한 차례 변환된 글자는 세 개의 로터를 차례로 통과하며 계속 바뀌었고, 마지막에 반사 로터를 거쳐 다시 반대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친 글자는 최종적으로 새로운 글자로 출력되었다. 수많은 배선 조합과 매일 달라지는 로터 위치 덕분에, 에니그마가 만들어내는 암호문은 당시 기준으로 사실상 해독이 불가능했다.
해독의 어려움
에니그마의 난제는 단순히 변환 과정이 많다는 점에 있지 않았다. 매일 아침, 독일군은 로터 위치와 플러그보드 연결을 새롭게 설정했다. 이로 인해 가능한 조합 수는 수천만에서 수십억에 이르렀고, 기존 방식의 연산으로는 현실적으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통신을 엿들을 수는 있었지만, 내용을 이해할 길은 없었다.
암호를 깬 사람들
해답은 영국 정부의 암호·암호문 해독 학교에서 나왔다. 이곳에는 수학자, 언어학자, 논리학자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었다.
복원된 앨런 튜링의 봄브 기계 (영국 버킹엄셔 블레츨리 파크)
By Ian Petticrew,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튜링은 이미 전쟁 전부터 암호 해독 문제에 관여하고 있었고, 뛰어난 수학적 직관과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접근 방식을 고안했다. 그는 독일군의 매일 바뀌는 설정을 자동으로 탐색할 수 있는 ‘봄브(Bombe)’ 기계를 설계했다. 봄브는 여러 설정을 동시에 시험해 가능한 조합을 빠르게 좁혀 나갔고, 그 결과 에니그마 해독 속도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전쟁에 미친 영향
에니그마 해독은 단순히 암호학의 승리를 넘어, 전쟁의 향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잠수함 작전이나 주요 공격 계획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피해를 크게 줄였다. 전쟁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에니그마 해독은 전쟁을 약 2~4년 단축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한 결과와도 직결된다.
과학과 역사의 교차점
에니그마 암호 해독은 단순한 기술적 사건이 아니라, 과학과 인류 역사가 만난 중요한 순간이었다. 앨런 튜링과 그의 동료들이 보여준 수학적 창의성과 협력은 현대 암호학과 컴퓨터 과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오늘날 “에니그마”라는 이름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문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역사 속에서 그 수수께끼는 결국 인간의 지성과 협력에 의해 풀려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