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개요
《꺼삐딴 리》는 전광용이 1962년 《사상계》 7월호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흔히 ‘해방기 소설’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해방이라는 단일한 역사적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전광용이 포착한 것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소련군 점령, 미군정,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쳐 전후 질서가 형성되는 시점까지 권력의 연속적인 이동 속에서 한 인간이 보여주는 적응의 방식이다. 시대는 급변하지만, 그 변화에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는 놀라울 만큼 일관되게 반복된다.
줄거리 요약
의사 이인국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통과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인 경찰과 군인들과 밀착하며 일본어와 일본식 생활방식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고, 일본인 환자와 권력자를 우대함으로써 부와 지위를 축적한다. 일본인들로부터 ‘꺼삐딴 리(캡틴 리)’라는 별칭을 얻는 것 역시 그에게는 권력과 가까운 위치를 증명하는 표식이다.
1945년 해방이 찾아오자 그는 기쁨보다 불안을 먼저 느낀다. 거리에는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는 벽보가 붙고, 군중의 분위기는 급속히 바뀐다. 곧이어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 진주하자 이인국은 일본과 관련된 흔적을 지우며 새로운 권력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빠르게 탐색한다. 그러나 과거에 치료를 거부했던 사상범 청년 춘석과의 악연은 결국 그를 체포와 구금으로 몰아넣는다.
감옥에서도 그는 반성이나 죄책감 대신 생존의 계산을 멈추지 않는다. 노어 회화책을 구해 소련군과의 소통을 준비하고, 전염병이 퍼진 감방에서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활용해 환자들을 치료한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 고문관 스텐코프의 눈에 띄어 군 병원으로 옮겨지고, 그의 혹을 성공적으로 수술함으로써 목숨과 자유를 보장받는다. 이인국은 소련 체제 아래에서도 ‘의사’라는 기술을 통해 또 한 번 살아남는다.
이후 한국전쟁과 1·4 후퇴를 거치며 그는 월남한다. 가족사는 완전히 흩어지고, 아내는 수용소에서 죽는다. 아들은 이미 소련으로 보내진 상태였고, 그 생사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남한에 정착한 그는 다시 병원을 열어 성공한 의료인이 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는 미군정 인사 브라운과의 관계를 통해 미국 연수의 기회를 얻는다. 일본 제국에서 소련 체제로, 다시 미국 중심의 질서로 권력의 축이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에 대응하는 이인국의 태도는 일관되게 되풀이된다.
해방의 소설이 아니라 ‘적응’의 소설
이 작품을 해방기의 친일파 비판 소설로만 읽으면 핵심을 놓치기 쉽다. 전광용이 묻는 질문은 “누가 친일이었는가”가 아니라, 권력이 바뀔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일본, 소련, 미국이라는 서로 다른 체제는 이인국에게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선택지일 뿐이다. 그는 어느 쪽이 옳은지를 묻지 않고, 어느 쪽이 살아남기에 유리한지를 계산한다.
이인국이라는 인간형
이인국은 신념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신념을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드는 태도를 지녔다는 점에서 더 불편한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어쩔 수 없었다”는 언어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시대의 책임을 개인의 선택에서 분리한다. 적극적인 악행보다는 능숙한 회피와 적응이 그의 무기다. 그래서 그는 영웅도 악당도 아닌, 현실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인간형으로 남는다.
심판이 없는 결말의 의미
《꺼삐딴 리》에는 통쾌한 응징이 없다. 이인국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기회를 얻는다. 이 ‘심판의 부재’는 우연한 결말이 아니라, 작품의 메시지 그 자체다. 전광용은 묻는다. 왜 이런 인간은 매번 살아남는가. 그리고 그 질문을 독자에게 돌려준다.
오늘 읽는 《꺼삐딴 리》
이 소설은 특정 시대에 묶여 있지 않다. 권력이 이동할 때마다 태도를 바꾸며 살아남는 인간의 모습은 이후의 시대에서도 반복된다. 그래서 《꺼삐딴 리》는 과거를 고발하는 작품이 아니라, 권력과 인간의 관계를 해부한 설명서처럼 읽힌다. 지금도 이 작품이 불편하게 남는 이유는, 그 인간형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