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무한하지 않다
인간의 뇌는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끝없이 저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억은 ‘남기는 것’과 ‘버리는 것’이 균형을 이뤄야 제대로 작동한다.
필요한 기억은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고 삶을 이어가는 데 꼭 필요하다. 중요한 사건의 순서를 연결하고, 주변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또한 과거의 경험은 현재를 판단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가치가 낮거나 다시 쓸 가능성이 적은 정보까지 모두 간직한다면, 뇌는 과부하 상태에 빠져 집중력이 크게 떨어지고 판단이 둔해질 수 있다.
일상의 사소한 망각
책을 읽다가 전화를 받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을 때 방금 읽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뇌가 새로운 자극으로 주의를 옮기면서 이전의 짧은 기억을 덮어쓴 결과다.
또는 장 보러 가며 분명히 사고자 했던 물건이 있었는데 계산대 앞을 지날 때까지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순간적인 망각은 결함이 아니라, 주의와 기억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뇌의 전략이다.
뇌가 선택적으로 잊는 이유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면, 뉴런(신경세포) 사이에 시냅스 연결이 생겨 ‘기억의 길’이 만들어진다. 같은 정보를 반복해 사용하면 이 연결이 강화돼 더 쉽게 꺼내 쓸 수 있다.
하지만 뇌는 모든 연결을 유지하지 않는다. 사용 빈도가 낮은 정보는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 과정을 거쳐 연결이 약화되고 결국 사라진다. 이는 불필요한 데이터로 뇌가 과부하되는 것을 막아, 중요한 정보 처리 속도를 높인다.
고통스러운 기억의 완화
망각은 불필요한 정보뿐 아니라, 감정적으로 과도한 기억에도 작동한다. 트라우마나 극심한 고통을 준 경험은 뇌가 일부 세부 내용을 흐리게 하거나 변형해 저장한다. 해마(hippocampus)와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이 서로 협력해 이런 기억을 ‘덜 날카로운 형태’로 바꿔, 불필요한 스트레스 반응을 줄인다.
잊음이 주는 창의성
망각은 생존과 정서 안정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게 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망각은 오래된 사고 틀을 비워 새로운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반대로 과도한 스트레스나 피로 상태에서는 뇌의 창의적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이미 굳어진 패턴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래서 창작 활동에서 ‘아이디어가 막히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잘 잊는 것도 능력이다
불필요한 기억으로 가득 찬 뇌는 오래 방치된 창고처럼 무질서할 것이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고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려면 이런 기억을 정리하고,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가치 없는 기억을 덜어낼수록 뇌는 한결 가벼워지고 생각도 선명해질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잘 잊는 능력’은 약점이 아니라 정신적 성장을 이끄는 숨은 힘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