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셜록 홈즈의 그늘 아래에서

아서 코난 도일 사진

아서 코난 도일 경(Sir Arthur Conan Doyle). 유리 건판 네거티브로 촬영.

By Bain News Service,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이야기꾼의 탄생과 의사의 길

1859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찰스와 열정적인 이야기꾼이었던 어머니 메리 사이에서 성장했다. 어머니 메리는 전설과 민담을 들려주며 어린 도일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도일은 나중에 어머니의 이야기 솜씨가 어릴 적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도일은 아홉 살에 잉글랜드 기숙학교로 보내졌고, 동급생들 사이에서 이야기꾼으로 인기를 끌었다. 17세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에든버러 대학교 의대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교수인 조지프 벨(Joseph Bell) 박사를 만나 나중에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의 모델이 된 그의 놀라운 관찰력과 논리성을 경험했다.

재학 중에 도일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스타일의 괴기소설을 쓰며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했고, 『사사사 계곡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Sasassa Valley, 1879)』라는 단편을 지역 잡지에 발표했다. 그는 글을 통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체감했다.

셜록 홈즈의 탄생과 의도 밖의 성공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도일은 맨 처음 배에서 의사로 근무했다. 재학시절에도 물개잡이 배에서 선원들을 치료했었던 그의 승선 경험은 훗날 셜록 홈즈의 몇몇 단편에도 충실히 반영되었다. 일례로 『검은 피터(The Adventure of Black Peter, 1904)』에서는 전직 선장이 작살에 찔려 살해되는 사건이 다뤄진다. 여기서 단서로 등장하는 바다표범 가죽 담배 주머니는 도일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육지로 돌아온 그는 병원을 열고 가정을 꾸리면서도,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1886년, 도일은 한 탐정과 그의 조수인 의사에 관한 이야기를 집필했고, 이 추리소설은 『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 1887)』라는 제목으로 크리스마스 잡지에 실렸다. 원고료는 단 25파운드였다.

아서 코난 도일 셜록 홈즈

홈즈!” 내가 외쳤다. “당신은 너무 늦었어요!” (원래 캡션)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The Five Orange Pips, 1891)」, wikimedia commons.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와 왓슨 박사(Dr. Watson)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1890년 우연히 한 미국 출판사의 편집자의 손에 들어갔다.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 본 출판사 측은 곧바로 도일에게 후속편을 의뢰했고, 『네 사람의 서명(The Sign of the Four, 1890)』이 출간되었다.

이후 『스트랜드 매거진(Strand Magazine)』에 연재된 셜록 홈즈 단편들은 대중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도일은 졸지에 인기작가로 부상했으나 창작의 자유를 상실했다는 불편함도 커져갔다. “홈즈는 나를 부자로 만들었지만, 내 작가 인생을 속박했다.”

죽음과 반발, 그리고 셜록 홈즈의 귀환

1893년 도일은 『마지막 사건(The Final Problem)』에서 셜록 홈즈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죽인다. 일기장에는 “홈즈를 죽였다. 기분이 후련하다”고 남겼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거리에는 검은 완장을 찬 팬들이 나타났고, 2만 명이 『스트랜드 매거진』의 정기구독을 취소했으며, 편집부에는 항의 편지가 쏟아졌다. 도일은 역사소설과 논픽션에 집중하려 했으나, 홈즈를 향한 대중의 열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1901년 그는 홈즈가 과거에 활약한 이야기라는 설정으로 『바스커빌 가의 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1901)』를 발표했고, 팬들은 열광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홈즈를 원했다.

 

셜로 홈즈의 귀환

1903년 9월 26일 『콜리어스』에 실린 코난 도일의 「빈집의 모험」 삽화.

By Frederic Dorr Steele,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결국 1903년 『빈집의 모험(The Adventure of the Empty House)』에서 홈즈는 부활한다. 절벽에서 떨어진 줄 알았지만 사실은 위장이었다는 설정이었다. 이후 『셜록 홈즈의 귀환(The Return of Sherlock Holmes, 1905)』이 연재되었고, 도일은 다시 셜록 홈즈의 아버지가 되었다.

전쟁과 작가로서의 야망

1900년 도일은 보어 전쟁에 자원하여 야전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이 경험은 『대보어전쟁(The Great Boer War, 1900)』이라는 500쪽의 군사 연대기로 이어졌고, 1902년 그는 에드워드 7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다. 당시 국왕 역시 홈즈의 팬이었으며, 작위 수여가 홈즈의 부활을 격려하려는 의도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도일은 여전히 역사와 논픽션 작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대보어전쟁』 외에도 그는 다양한 정치적 사안 – 인도 식민 통치, 콩고 문제 등 – 에 목소리를 냈지만 대중은 홈즈 외의 작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상실과 신비의 세계로

1906년 첫 번째 아내 루이사(Louisa)의 죽음,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들 킹슬리의 전사는 도일을 심령주의로 이끌었다. 그는 이미 초기에 발표한 중편 『콜룸버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Cloomber, 1889)』에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바 있었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영국 심령연구협회의 회원이 되어 인간 정신의 미지 영역을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그의 두 번째 아내 진(Jean) 역시 텔레파시에 심취했다. 부부는 함께 오컬트(occult)를 추적하며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도일은 요정 사진, 텔레파시, 강신술과 같은 주제에 진지하게 몰두했고, 이로 인해 과학계와 언론의 조롱을 받았다. 마술사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와의 우정도 심령주의를 둘러싼 견해 차이로 무너졌다. 그러나 도일은 단호했다. “나는 거짓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실이라 부르는 것의 경계를 믿는 것이다.”

이야기의 끝, 작지만 거대한 유산

1930년 7월 7일, 아서 코난 도일은 세상을 떠났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내에게 건넨 “당신은 정말 놀라워요”였다. 그는 평생 자신이 저술한 역사서와 논픽션으로 기억되길 바랐지만, 세상은 그를 명탐정 셜록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4편과 단편 56편으로 기억한다. 그는 셜록 홈즈를 창조했고, 죽였고, 다시 살렸다. 그리고 언제나 진실과 진실 너머의 그 경계를 탐색하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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