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사도 바울〉, 1657년경,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기독교를 확장시킨 가장 영향력 있는 사도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 바울(apostle Paul)만큼 깊은 흔적을 남긴 인물은 드물다. 그는 예수보다 약간 늦게 태어난 동시대 인물로, 한때는 열렬한 기독교 박해자였지만 결국에는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종교의 전파에 헌신했다. 바울의 영향력은 단순한 선교를 넘어 신학의 틀을 형성했고, 그가 남긴 사상은 수 세기에 걸쳐 서구 종교와 사유를 지배해왔다.
유대인, 로마 시민, 그리고 개종자
바울은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현재 터키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보유했으며, 혈통상 유대인이었고, 철저한 유대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히브리어를 습득하고, 직업으로는 천막 제조 기술을 익혔다. 젊은 시절 예루살렘으로 향한 그는 저명한 유대교 학자 가말리엘 랍비 밑에서 수학했다.
흥미롭게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머물던 시기는 예수와 겹쳤으나,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마스쿠스의 전환점
원래 바울은 기독교를 적대시했다. 예수를 따르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단으로 간주됐고, 바울도 이 박해에 앞장섰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길, 그는 예수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환상을 경험했고, 이는 그의 신념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기독교의 적에서 가장 열렬한 옹호자로 돌아선 것이다.
이후 바울은 생애를 오롯이 기독교 전파에 바쳤다. 그는 소아시아, 그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을 넘나들며 선교활동을 펼쳤고, 특히 비유대인(이방인) 대상의 포교에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흔히 ‘이방인의 사도’라 불린다.
논란과 확산의 교차점
바울의 사상은 기독교 확산의 핵심 동력이 되었지만, 내부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유대교 율법, 즉 식이 규정이나 할례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입장은 일부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강한 반발을 샀지만,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지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또, ‘율법 준수’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죄의 용서와 구원을 가져온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바울은 ‘원죄’ 개념을 명확히 정립해 기독교 교리의 한 축을 세웠다.
여성과 결혼에 대한 견해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고, 여인과의 관계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성(性)과 여성의 지위에 대해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인 관점을 고수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독신을 권장하며, 정욕을 억제할 수 없다면 차라리 결혼하라고 충고했다.
여성에 대해서도 그는 “여자는 조용히 배우며 남성을 지배하지 말라”(디모데전서)고 기록했고, 이 같은 견해는 신약성경 곳곳에 강하게 드러난다. 주목할 점은, 예수는 바울과 달리 여성에 관한 이러한 직접적이고 억압적인 발언을 남긴 바 없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과 바울의 위상
바울은 기독교를 단순한 유대교의 분파가 아닌, 독립된 세계 종교로 변모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적어도 13권이 그의 저술로 전해진다. 현대 학계에서는 이 중 일부가 그의 작품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바울이 신약성경의 핵심 저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핵심 교리는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이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로 남아 있다.
바울의 사상, 예수를 넘어선 영향력
바울의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 등 후대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력은 때로 예수에 필적한다는 주장까지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 같은 평가는 논쟁의 여지가 크며, 대다수는 이를 지나친 해석으로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다른 어떤 기독교 사상가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까지, 예수와 더불어 바울의 존재는 결코 분리해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단순한 선교사를 넘어, 기독교 확립의 실질적 토대를 제공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