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없는 상상의 세계 ᅳ 아판타지아(Aphantasia)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상상

아판타지아, 보이지 않는 상상

우리는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릴 수 있다. 바다를 떠올리면 파도가 밀려오고, 어릴 적 집을 생각하면 그 시절 냄새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상상이 전혀 불가능하다. 눈을 감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기억 속 얼굴이나 풍경을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도 없다. 이 독특한 현상을 아판타지아(Aphantasia)라고 한다.

이미지를 그리지 못하는 뇌

아판타지아는 시각적 상상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 증상을 가진 사람은 과거의 경험이나 사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려 해도 윤곽이나 색감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그 친구의 특징 ᅳ “안경을 썼다”, “머리가 짧다” ᅳ 와 같은 언어적 정보만 생각난다.

과학자들은 이 현상이 단순한 ‘상상력 부족’이 아니라, 뇌의 시각적 이미지 생성 네트워크에서 일어나는 연결 이상 때문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시각피질과 해마, 전전두엽은 함께 작동하여 기억 속 정보를 기반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만, 아판타지아에서는 이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현상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경우도 있고, 특정 질환이나 뇌수술로 인해 후천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평생 자신이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다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우연히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도 있다.

동공이 말해주는 사실

아판타지아 연구의 중요한 단서는 동공 반응에서 발견되었다.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UNSW)의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밝거나 어두운 사물을 ‘상상해 보라’고 요청했다. 일반인의 경우, 실제로 빛을 보는 것처럼 밝은 물체를 상상하면 동공이 수축하고, 어두운 물체를 상상하면 동공이 확장되었다. 이 결과를 통해 뇌가 상상을 실제 시각 자극처럼 처리한다는 사실이 리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하지만 아판타지아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뇌는 상상을 시각적 경험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동공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이 결과는 ‘마음속의 이미지’가 단순한 심리적 작용이 아니라, 신경 생리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실체임을 보여준다.

이미지 없이도 남는 기억

흥미로운 점은, 아판타지아를 가진 사람들도 사실을 기억하는 능력은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보는 방식’으로 기억하지 않을 뿐, 언어나 논리적 구조를 통해 정보를 저장하고 회상한다. 그래서 시각 예술보다는 언어적·개념적 사고에 강점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 현상은 인간의 기억이 단일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어떤 사람에게 기억은 이미지의 흐름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단어의 연쇄이며, 그 차이는 뇌의 연결 구조가 만들어낸 개성이다.

보이지 않아도 가능한 상상

아판타지아는 병이 아니다. 그것은 의학적 질환이라기보다 인간 인지 스펙트럼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신경학적 다양성이다.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창의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부 아판타지아를 가진 예술가나 과학자는 논리적 상상력과 추상적 사고를 통해 독창적인 성취를 이루고 있다.

‘마음의 눈’이 없더라도, 인간의 사고는 다른 경로로 세상을 그려낸다. 아판타지아는 우리에게 상상력이란 단순히 그림을 떠올리는 능력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뇌의 또 다른 언어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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