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인데 익숙한 순간: 데자뷔(déjà vu)는 왜 일어나는가

데자뷔 일러스트레이션

By Sep nabi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서론

데자뷔(déjà vu)는 낯선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독특한 경험이다. 뇌의 오류라기보다 기억과 지각이 상호작용하는 미묘한 순간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현대 기억 연구와 신경과학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모델을 제시해 왔고, 서로 다른 관점이지만 모두 기억 시스템의 비의식적 작동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암묵기억 단서(implicit memory cue)

데자뷔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모델은 현재 장면 속에 과거 경험의 부분적 요소가 포함될 때 발생하는 ‘기시감’이다. 이 메커니즘은 재인 기억(recognition memory)에서 “익숙함”이 “회상(recollection)”보다 먼저 작동하는 성질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예컨대 특정 구조의 방, 유사한 가구 배치, 비슷한 질감의 벽면이나 조명 같은 요소가 과거 기억의 일부를 은밀히 불러내면, 전체 경험은 처음임에도 익숙하게 느껴진다.

미국 콜로라도주립대학교(Colorado State University)의 인지심리학자 앤 클리어리(Anne Cleary)의 VR 연구는 이 모델을 뒷받침한다. 참가자들은 첫 실험에서 본 사소한 디테일이 두 번째 실험 공간에서 반복될 때, 이를 명시적으로 기억하지 못해도 높은 빈도로 데자뷔를 경험했다. 즉, 데자뷔는 기억은 떠오르지 않으나 익숙함 판단만 활성화되는 ‘암묵기억 기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중 처리 지연(dual-processing lag) 가설

지각 정보는 뇌의 여러 경로를 통해 동시에 처리되는데, 이 경로들 사이에 수 밀리초 (milliseconds) 수준의 미세한 지연이 발생하면 데자뷔가 나타날 수 있다. 첫 번째 경로를 통해 입력된 장면은 즉시 ‘현재 경험’으로 저장되지만, 지연된 두 번째 경로에서 같은 정보가 도달하면 뇌는 이를 이미 처리한 기억으로 오인한다.

이 모델은 부호화 지연(encod­ing delay) 또는 분리된 경로 처리(parallel processing)의 흔들림을 기반으로 하며, 시간 인식의 아주 미세한 어긋남이 “이미 본 것 같은 감각”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소스 모니터링 오류(source monitoring error)

「데자뷔, ‘SeeD 파일럿 프로젝트’를 위해, 선전(深圳), 2023」

By Profile Art 侧面艺术工作室,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새로운 경험이 과거의 특정 기억과 구조적으로 겹치는 경우, 뇌가 그 경험의 “출처(source)”를 잘못 판단하여 데자뷔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소스 모니터링(source monitoring) 과정의 특징으로, 정보는 익숙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판단하는 기능이 정확히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과거에 방문했던 장소와는 전혀 다른 곳이지만, 배치, 냄새, 온도, 음향적 특성 등 다양한 감각 구성요소가 과거 기억과 통계적으로 유사하면 뇌는 이를 잠재적 동일 경험으로 분류하려 한다. 그 순간 “처음인데 익숙한” 특유의 어긋남이 발생한다.

측두엽 미세방전(temporal lobe micro-seizure)

데자뷔는 측두엽(temporal lobe), 특히 해마(hippocampus)와 연관된 네트워크에서 일어나는 아주 짧은 전기적 방전(micro-seizure)에 의해 유발될 수도 있다. 이 설명은 간질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출발했지만, 건강한 사람에게도 극도로 미세한 과흥분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측두엽은 기억의 부호화와 재인에 핵심적인 영역이므로, 이 부위의 순간적 과활성화는 이유 없는 익숙함 신호를 잘못 생성할 수 있다. 실제로 간질 발작 직전에 강렬한 데자뷔를 경험한다고 보고하는 사례가 있으며, 이는 기억 회로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오작동(minor malfunction in memory circuits)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주의 단절(attentional disruption) 모델

주의가 잠시 흔들릴 때, 지각된 정보가 뇌에서 단기기억(short-term memory)에 스쳐 지나가며 기록될 수 있다. 이후 주의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 같은 장면을 다시 마주하게 되면 뇌는 이를 “이미 기억 속에 있던 장면”으로 해석하며 익숙함을 느낀다.

이 과정은 보통 수 초 이하의 아주 짧은 간격에서 일어나며, 멍해지는 순간과 그 직후의 지각이 서로 다른 범주로 저장될 때 데자뷔가 형성된다. 실제 경험과 방금 전의 기억이 서로 교차하면서 시간적 어긋남이 생기는 방식이다.

결론

데자뷔는 단순한 기억 착오가 아니라, 기억과 지각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순간에 나타나는 인지적 현상이다. 우리는 어떤 장면을 처음 보면서도 간혹 익숙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는 과거의 단서가 무의식적으로 활성화되거나 지각 정보가 시간차를 두고 중복 처리되거나 기억의 출처 판단이 흔들릴 때 일어난다. 때때로 기억 회로의 미세한 과흥분이나 주의의 아주 짧은 단절이 이러한 착각을 더욱 강화한다.

이처럼 데자뷔는 오류라기보다, 정교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기억 시스템의 특성이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데자뷔는 단지 일상적 기묘함을 넘어,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기억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