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NA 가닥이 풀리면서 유전 정보가 드러나는 모습을 상징
By U3190456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후성유전학이란 무엇인가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유전자의 염기서열 자체를 바꾸지 않고도 생물의 특징과 행동이 달라질 수 있음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에피(epi-)’는 그리스어로 ‘~위에’를 뜻한다. 즉 후성유전학은 유전자(DNA) 위에서 작동하는 조절 체계를 다룬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DNA의 기본 정보는 그대로 둔 채 어떤 유전자를 언제, 어느 정도 발현시킬 것인가(gene expression)를 결정하는 시스템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유전자를 고치는 학문이 아니라 유전자를 사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학문에 가깝다.
사람의 DNA에는 약 2만 개 이상의 유전자가 들어 있지만, 이 모든 유전자가 항상 동시에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신경세포, 간세포, 근육세포가 서로 전혀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세포는 동일한 DNA를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역할에 필요한 유전자만을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유전자는 가능성의 목록이다. 후성유전은 그중 무엇을 꺼내 쓸지를 정하는 규칙이다.
이 선택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배아 발달(embryonic development) 단계에서부터 성장기, 노년에 이르기까지 생물은 시기마다 다른 기능을 필요로 한다. 그때마다 유전자의 스위치는 켜졌다가 꺼진다. 이 가변적인 조절 과정이 바로 후성유전학의 핵심이다.
환경은 유전자의 지휘자가 된다
후성유전학이 중요한 이유는 환경(environment)이 이 조절 과정에 직접 개입하기 때문이다. 영양 상태, 스트레스, 약물, 생활 습관 같은 외부 요인은 유전자 발현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유전자의 서열은 변하지 않았는데, 결과가 달라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란성 쌍둥이(identical twins)는 이 개념을 이해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동일한 DNA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면 외모, 체질, 성격, 나아가 특정 질병에 대한 위험도까지 달라질 수 있다.
이 차이는 유전자 염기서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유전자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후성유전적 차이(epigenetic differences)이다.
동물의 행동은 후성유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원리는 인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조절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개가 사람의 냄새를 정밀하게 구별하는 능력, 새들이 둥지를 두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 번식 과정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신체적 부담은 단순한 본능의 결과가 아니다. 이는 환경 압박과 생존 전략 속에서 특정 유전자들이 선택적으로 활성화된 결과이다.
같은 종의 동물이라도 성장 환경에 따라 공격성, 사회성, 스트레스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유전자가 달라서가 아니라 환경이 유전자의 표현 방식(expression pattern)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후성유전학은 이러한 행동의 차이를 ‘타고난 성격’이라는 말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대신 생물학적 조절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유전자는 설계도, 후성유전은 조정 패널이다
후성유전학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한 비유는 이것이다. 유전자는 설계도(blueprint)이고, 후성유전은 그 설계도를 어떻게 읽을지를 정하는 조정 패널(control panel)이다. 같은 설계도라도 조정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이 관점은 인간의 질병(disease), 발달(development), 노화(aging), 행동(behavior)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 우리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유전자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환경이 전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유전자와 환경 사이에서 작동하는 정교한 조절 메커니즘, 그것이 바로 후성유전학이다.
마무리하며
후성유전학은 “DNA가 곧 운명이다”라는 생각에 균열을 낸다. 유전자는 변하지 않지만 삶의 조건은 유전자의 표현을 끊임없이 바꾼다. 그래서 같은 유전자를 가진 존재도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후성유전학은 차이를 설명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우연이 아니라 조절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