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많은 악마
우리는 흔히 ‘악마’를 떠올릴 때, 하나의 존재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존재를 부르는 이름은 놀라울 정도로 많다. 사탄(Satan), 루시퍼(Lucifer), 디아블로(Diablo), 데블(Devil)… 때로는 동일한 존재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이름은 서로 다른 언어와 시대, 다는 문화적 맥락에서 탄생했다. 이름은 단지 호칭이 아니라 어떤 개념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흔적이다.
사탄(Satan): 고발자, 방해자
‘사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שָׂטָן (śāṭān)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본래 ‘고발자’, ‘대적하는 자’라는 뜻을 지니며, 구약 성경에서는 반드시 ‘절대악’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예컨대 『욥기』에서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시험하겠다고 요청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허락 아래 활동하는 감시자 또는 검사관 같은 역할을 한다.
‘사탄’은 초기 유대교에서 특정한 존재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역할 명칭에 가까웠다. 시간이 흐르며 이 단어는 점차 특정한 악의 존재, 즉 ‘악마’로 고정되었다. 이후 기독교 전통 속에서 ‘사탄’은 신의 반대편에 서는 초월적 악의 실체로 자리잡게 된다.
루시퍼(Lucifer): 빛의 운반자
루시퍼는 라틴어 lucifer에서 유래한 단어로, lux(빛) + ferre(운반하다)의 합성어다. 원래는 단순히 ‘새벽별’ 또는 ‘금성’을 의미했으며, 고대 로마에서는 ‘새벽의 신’처럼 긍정적인 이미지로 쓰이기도 했다.
기독교 문맥에서 루시퍼라는 단어는 이사야서 14장 12절에서 등장한다. “너, 아침의 아들 루시퍼여, 어찌하여 하늘에서 떨어졌는가?”라는 번역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구절은 본래 바빌론 왕의 몰락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이지만, 중세 신학자들은 이를 타락한 천사에 대한 묘사로 해석했다. 그렇게 루시퍼는 점차 ‘빛을 잃고 추락한 존재’, 즉 사탄과 동일시되는 인물로 재구성된다.
흥미로운 점은 루시퍼는 성경에서 단 한 번 등장하며, 그마저도 ‘악마’라는 직접적인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 이후 신학과 문학은 루시퍼를 타락한 천사이자 최초의 반역자로 해석하고, 그의 이름에 심오한 상징성을 부여했다.
디아블로(Diablo): 분열시키는 자
‘디아블로’는 게임 제목으로 유명해졌지만, 그 뿌리는 고대 그리스어 διαβολος (diabolos)에 있다. 이 단어는 dia- (가로질러) + ballein (던지다)의 결합으로, 원래 의미는 ‘중상하는 자’, ‘비방자’, 또는 ‘분열시키는 자’였다. 이 말은 라틴어 diabolus를 거쳐 스페인어로 diablo, 영어로는 devil이라는 형태로 정착되었다. 즉, 디아블로는 의도적으로 공동체를 혼란시키고 관계를 무너뜨리는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diabolos’는 명확히 ‘악마’를 뜻하게 되었으며, 특히 사탄의 또 다른 이름으로 자주 사용된다.
흥미롭게도 이 어원은 ‘거짓말’이나 ‘왜곡’이 아니라 ‘갈라놓는 행위’에 방점을 찍는다. 이런 의미에서 디아블로는 말을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흔드는 존재, 즉 중상과 분열의 언어적 상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의 악, 세 개의 언어
이처럼 사탄, 루시퍼, 디아블로는 모두 ‘악마’를 가리키는 단어처럼 보이지만, 그 기원과 맥락은 다르다. 사탄은 히브리 전통에서 유래한 고발자, 루시퍼는 라틴어 문화에서 탄생한 빛의 존재, 디아블로는 헬레니즘-기독교 전통에서 정의된 분열자다.
결국 이 이름들은 모두 다른 시대와 언어, 신학적 세계관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같은 존재를 지칭한다고 해도, 각각의 단어는 그 사회가 ‘악’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준다.
언어는 악을 어떻게 형상화했는가
우리가 어떤 존재를 ‘악마’라고 부를 때 사실은 단어 하나에 담긴 세계관을 함께 호출하고 있다. 사탄이든 루시퍼든 디아블로든 이 이름들은 그 자체로 언어가 개념을 만들고 감정을 조직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언어는 단순한 기호체계를 넘어서 우리가 세계를 구분하고, 질서를 만들며, 두려움을 형상화하는 방식이다. 악마의 이름이 많은 이유는 우리가 그 존재를 단순히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기에 더욱 많은 이름을 부여해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