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마을, 애글로
1930년대 뉴욕주의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애글로(Agloe)’라는 마을이 눈에 띈다. 지도상에 도로와 위치가 명확히 표시되어 있어 실재하는 마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곳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허구의 장소다.
오토 G. 린드버그(Otto G. Lindberg)와 어니스트 앨퍼스(Ernest Alpers)라는 두 지도 제작자는 자신들의 이름 이니셜을 조합해 ‘Agloe’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이는 저작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누군가 그들의 지도를 무단 복사해 출판했다면, 그 안에 ‘Agloe’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근거로 표절을 입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존재하지 않는 지명을 지도에 고의로 삽입한 것을 ‘페이퍼 타운(paper town)’ 또는 ‘유령 마을(phantom settlement)’이라고 부른다.
지명 하나로 판가름 나는 표절
페이퍼 타운은 단순한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라, 실제 법적 분쟁의 핵심이 된 적도 있다. 2001년, 영국의 자동차 협회(AA)는 오던스 서베이(Ordnance Survey)의 지도를 표절한 사실이 드러나 약 2천만 파운드에 달하는 손해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이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가짜 지명이었다.
지도제작자들은 때로는 길 이름 하나만 살짝 바꾸거나, 존재하지 않는 도로를 넣기도 한다. 예컨대 ‘Lye Close’처럼 인위적인 느낌의 이름, 런던의 ‘Moat Lane’, 에든버러의 ‘Oxygen Street’처럼 그럴듯한 이름도 있다. 이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삽입된 ‘트랩’이다.
현실이 된 허구
흥미로운 것은 언어적 장치로 만들어진 이 허구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애글로는 원래 가상의 지명이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그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현지 상호에 ‘Agloe’라는 이름이 붙었고, 결국 ‘실제로 존재하는 마을’처럼 인식되었다.
또 다른 사례는 ‘아글턴(Argleton)’이다. 한때 구글지도를 검색하면 영국의 허허벌판에 위치한 이 마을이 나타났다. 역시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지만 사용자들은 흥미를 느꼈고, “Argleton은 ‘Not real G’의 애너그램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여기서 G는 Google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구글은 단순한 실수라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조차 의심했다.
“빌레펠트는 없다” 라는 농담에서 보는 언어유희
독일에서는 반대 방향의 농담도 있다. 북서부의 실제 도시인 빌레펠트(Bielefeld)를 두고 “그 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Bielefeld gibt es nicht)”는 음모론이 1993년부터 인터넷을 통해 유행했다.
이 농담은 “빌레펠트에 가봤다고 말하는 사람은 조작된 존재”라는 식의 패러디로 확산됐고, 심지어 독일정부는 “빌레펠트는 실제 존재합니다”라는 공식입장을 내기도 했다. 이 사례는 실존하는 지명에 허구성을 뒤집어씌운 언어유희의 대표적 사례다.
이름이 세계를 만든다
페이퍼 타운은 단순히 저작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지점은 이름이 존재를 만들어내고, 지명이 현실을 구성한다는 점에 있다.
지도는 세계를 그리는 언어의 집합이며, 그 안에 삽입된 단어 하나가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존재하지 않던 마을이 상상 속에서 실체를 얻고, 가짜로 취급되던 도시는 오히려 더 유명해진다.
이처럼 언어는 허구를 현실로 바꾸고, 현실을 다시 허구로 되돌리기도 한다. 페이퍼 타운은 단순한 지도의 장난이 아니라 언어가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