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에서 1인칭 단수 대명사 ‘I’는 언제나 대문자로 쓰인다. 독일어 ich, 프랑스어 je, 이탈리아어 io처럼 대부분의 언어는 ‘나’를 소문자로 적는데, 영어만 이 예외적인 규칙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왜 영어에서는 ‘I’만 대문자를 쓰게 되었을까?
고대 영어에서 중세의 ‘I’로
‘나’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게르만어 ich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영어에서는 ich, ic, i 같은 여러 형태가 함께 쓰였는데, 중세에 접어들며 뒤의 자음이 탈락해 결국 i 하나만 남았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당시는 모든 문서가 필사본으로 작성되던 시대였고, 얇은 깃펜과 고르지 않은 양피지 위에서 소문자 i는 너무 작아 쉽게 다른 글자에 묻혀 버렸다. 특히 문장에서 단독으로 쓰이는 대명사는 사라지거나 흐려지는 순간 문장의 의미가 크게 흔들렸다.
필사자들은 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 보다 선명한 형태, 즉 대문자 I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선택은 특별한 철학이나 상징 때문이 아니라 글자가 잘 보이게 하려는 지극히 실용적인 조정이었다.
관습이 된 필사본의 흔적
이후 인쇄술이 등장했을 때도 대문자 I의 선명함은 그대로 유효했다. 소문자 i는 점이 떨어지거나 가벼워 보이는 문제가 지속되었고, 반대로 대문자 I는 활자에서도 안정적이었다. 이렇게 필사 시대의 작은 해결책이 근대 영어 표기 규칙으로 영구히 고착되었다.
다른 가설들
역사언어학에서는 몇 가지 다른 가설도 등장한다. 문장에서 주어로 자주 등장하는 대명사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 ‘나’를 나타내는 말에 사회적·문화적 중요성을 담았다는 화자 강조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들은 보조적 수준에 머무른다. 현재 학계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주장은 필사본 시대의 가독성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용적 필요였다는 것이다.
글자 하나에 남은 언어의 역사
오늘날 영어에서 ‘I’를 대문자로 쓰는 관습은 자아를 강조하는 문화적 상징이 아니다. 중세 필사본과 초기 인쇄술의 물리적 조건 속에서 우연히 선택된 작은 해결책이 시간이 지나 굳어진 결과에 가깝다.
글자 하나를 둘러싼 이러한 역사는 언어가 종종 거대한 원리보다 작은 실용의 선택에서 비롯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눈에 잘 띄라는 이유로 조금 키워 쓴 글자 하나가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 오늘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규칙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