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에서 시작된 가명
유럽의 오래된 문서에는 N.N.이라는 표기가 종종 등장한다. 이는 라틴어 nomen nescio, 곧 “이름을 모른다”라는 뜻이다. 이름을 알 수 없거나 밝히지 않을 때 썼던 약속이었다.
고대 로마의 법정에는 더 구체적인 가명도 있었다. 원고는 아울루스 아게리우스(Aulus Agerius), 피고는 누메리우스 네기디우스(Numerius Negidius)라는 이름을 달았다. 이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형식적 절차를 위한 가상의 이름이었지만, 법적 문서 속에서는 실제 사람처럼 등장했다.
영국 법정의 가명: John Doe와 Richard Roe
이 전통은 중세 영국으로 이어졌다. 당시 토지 분쟁 소송, 이른바 부동산 점유 회복 소송(ejectment)에서는 형식 요건을 갖추기 위해 가상의 원고와 피고가 필요했다. 그때 사용된 이름이 바로 John Doe와 Richard Roe였다.
원래는 원고 측 임차인과 피고 측 인물을 대리하는 허구의 이름이었지만, 점차 익명의 누군가를 뜻하는 표현으로 굳어졌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John Doe order(존 도 명령)’ 같은 법률 용례로 쓰이고, 일상에서는 John Smith나 A. N. Other가 더 흔하게 쓰인다.
미국에서 자리 잡은 John Doe / Jane Doe
미국에서는 John Doe가 완전히 정착했다. 법률 문서에서 피고인의 신원을 밝힐 수 없을 때, 수사 기록에서 신원 미상의 용의자나 시신을 지칭할 때, 응급실에서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환자를 등록할 때, 모두 John Doe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여성의 경우에는 Jane Doe라는 이름이 대응된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관습은 미국에서 확립된 특징이다.
이름 없는 사람, 언어의 흔적
라틴어의 N.N.에서 시작해, 로마법의 Aulus Agerius와 Numerius Negidius, 영국법의 John Doe와 Richard Roe, 그리고 미국의 John Doe와 Jane Doe로 이어지는 흐름은 단순한 명칭의 나열이 아니다.
허구의 가명은 법과 행정의 필요에서 비롯되었고, 시간이 흐르며 언어 속 관습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John Doe라는 이름에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