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하나에 담긴 삶의 방식
‘휘게(Hygge)’는 덴마크어로 따뜻하고 아늑한 상태, 혹은 그런 상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을 뜻한다. 이 단어는 고대 노르드어 hugga와 의미상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hugga는 ‘위로하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다’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휘게는 단순한 편안함이나 분위기를 넘어, 삶의 리듬을 조율하는 하나의 철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휘게는 촛불이 은은히 깔린 저녁 식탁, 벽난로 옆에서 읽는 책, 친구들과 느긋하게 나누는 대화처럼 구체적인 장면으로 그려질 수 있다. 그러나 그 핵심은 의식적으로 ‘좋은 순간을 음미하는 자세’에 있다. 바쁘고 예민한 일상 속에서, 아주 잠시 멈추어 지금 여기를 따뜻하게 감각하는 것 – 그게 바로 휘게다.
겨울이 만들어낸 문화적 지혜
덴마크는 겨울이 길고 어둡다. 해가 일찍 지고 기온은 낮으며, 바람도 거세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자연스럽게 실내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를 낳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정서적인 온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휘게는 그런 필요에서 비롯된 문화적 지혜이자 감정의 기술이다.
하지만 휘게는 겨울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여름 밤 테라스에서 친구들과 나누는 맥주 한 잔도 휘게일 수 있고, 아침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는 순간도 그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날씨나 계절이 아니라, 그 순간을 얼마나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물건이 아닌 마음에서 비롯된 감도
최근 몇 년 사이 휘게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국내에도 《휘게 라이프(Hygge Life)》, 《휘게 인테리어》 같은 책들이 출간되었고, 유튜브에는 ‘휘게 브이로그’ 콘텐츠도 자주 눈에 띈다. 가구 브랜드들은 ‘휘게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우고, 카페 인테리어에도 ‘휘게 감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진짜 휘게는 예쁜 소품이나 우드 톤의 가구에 있지 않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관계에서 비롯되며, 분위기가 아니라 마음의 감도에서 출발한다. 휘게적인 삶은 시간을 돈처럼 아껴 쓰기보다, 오히려 낭비처럼 보일 수 있는 느긋함 속에 숨겨진 가치에 주목한다. 거창한 기획보다 사소한 배려, 효율성보다 정서적인 충만함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삶의 방식이다.
한국에서 휘게를 말할 때
한국에서도 휘게는 빠르게 확산됐다. MZ세대의 ‘소확행’ 트렌드, ‘디지털 디톡스’, ‘루틴 브이로그’ 등의 움직임 속에는 휘게와 통하는 정서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외형을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경우도 많다. 휘게는 단순히 ‘예쁘게 사는 법’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휘게적인 삶은 집의 구조보다 마음의 구조를 바꾸는 일에 가깝다. 조용히 흐르는 음악, 촛불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 구조를 이루는 벽돌이 된다. 핵심은 ‘의도적인 편안함’이다. 의무나 기능을 내려놓고, 온기와 관계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일. 그것이 휘게다.
마무리하며
휘게는 덴마크 사람들만의 문화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편적인 감각이다. 삶을 빠르게 몰아가는 대신, 천천히 조명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모아가는 방식. 그것이 바로 휘게가 지닌 가장 부드러운 힘이다. 어쩌면 우리는 추운 겨울보다 더 차가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휘게는 지금, 여기에서, 더욱 필요한 단어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