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크러시(girl crush)’의 유래: 동경에서 콘셉트로

골든디스크 어워즈에 참석한 블랙핑크

2019 골든디스크 어워즈에 참석한 블랙핑크

By Newsen, CC BY 3.0, wikimedia commons.

표현의 출발

‘걸 크러시(girl crush)’는 원래 영어권에서 사용되던 구어적 표현이다. crush는 전통적으로 연애적 의미의 ‘호감’을 가리키지만, 2000년대 이후 여성 화자들 사이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특정 여성에게 느끼는 감탄과 존경, 그리고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동일시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의 ‘걸 크러시’는 성적 의미나 연애 감정을 내포하지 않는다. 핵심은 태도와 존재감에 대한 비성애적 동경이다.

감정의 성격

걸 크러시라는 감정은 사랑보다는 자기 투사에 가깝다. 외모 하나의 매력보다는 말투, 일하는 방식, 자기 확신, 독립적인 태도 등 개인의 정체성 전반이 감탄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표현은 경쟁이나 비교의 언어가 아니라, 호감과 선망을 전제로 작동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기보다 그 사람을 통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감정에 가깝다.

한국에서의 변형

이 표현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계기는 대중음악, 특히 K-pop이었다. 2010년대 초반 이후 걸 그룹의 이미지 전략 속에서 ‘걸 크러시’는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하나의 콘셉트로 정착했다. 보호받는 이미지나 귀여움을 중심에 두던 기존 여성상과 달리, 자기 통제와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캐릭터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2NE1 앨범 대체 커버

〈2NE1〉(2009년 EP) 대체 커버 이미지

By YG Entertainment, CC BY 2.0, wikimedia commons.

이 흐름 속에서 2NE1은 상징적인 출발점으로 자주 언급되고, 이후 BLACKPINK를 통해 글로벌 K-pop의 대표 이미지 중 하나로 굳어졌다. 이 과정에서 걸 크러시는 장르적 수식어이자 서사적 장치가 되었다.

콘셉트로서의 의미

K-pop에서의 걸 크러시는 단순히 ‘강한 이미지’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성 소비자 역시 주요한 감상 주체로 설정한 전략이며, 여성 간 감탄과 동일시를 전제로 설계된 캐릭터성이다. 누군가를 대상화하기보다는, 모범과 참고점으로 제시하는 방식에 가깝다. 이 점에서 걸 크러시는 전통적인 섹시 콘셉트와도, 순진함을 강조하는 이미지와도 구별된다.

왜 이 표현이 남았는가

‘쎈 언니’나 ‘자립적 여성’이라는 말도 가능했지만, ‘걸 크러시’는 대상에 대한 화자의 감탄과 동일시를 즉각적으로 표면화하는 표현으로 작동했다. 경쟁이나 대립의 뉘앙스를 지우고, 호감과 선망이라는 정서를 자연스럽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에 가까운 이 표현은 대중문화 속에서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오늘의 걸 크러시

오늘날 걸 크러시는 단순한 유행어를 넘어 하나의 관점이 되었다. 여성은 더 이상 특정 틀 안의 이미지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다른 여성이 보아도 설득력 있고 따라 해보고 싶은, 스스로를 투사할 수 있는 존재로 제시된다. 걸 크러시라는 표현은 이 변화를 가장 압축적으로 담아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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