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에서 시작된 단어
‘팬덤(fandom)’은 지금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이다. 아이돌, 영화, 드라마, 스포츠, 게임 등 어느 분야든 열정적인 지지자들이 모이면 그 집단을 자연스럽게 ‘팬덤’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단어는 처음부터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진 않았다. 그 출발점에는 오히려 조롱과 경계의 시선이 있었다.
fan의 뿌리: fanatic에서 fan으로
‘fan’은 ‘fanatic’의 줄임말이다. fanatic은 라틴어 fanaticus에서 유래했으며, 본래는 신에게 사로잡힌 듯한 사람, 즉 종교적 광신자를 뜻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이 단어가 스포츠 관중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야구나 복싱 같은 인기 종목에서 열광적인 관객을 ‘fan’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이 말은 단순한 지지자가 아니라 감정에 휩쓸린 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fan’은 긍정적인 자부심보다는 약간의 비웃음이 섞인 표현이었다. 스포츠 팬은 객관성을 잃은 존재로 묘사됐고, 이 단어에는 ‘선 넘는 사람들’이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팬덤(fandom), 열광의 세계
‘fan’에 -dom이라는 접미사가 붙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팬덤(fandom)’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dom은 왕국(kingdom), 자유(freedom), 스타덤(stardom)처럼 영역, 상태, 공동체를 뜻한다. 즉, fandom은 ‘팬들의 수’가 아니라 ‘팬들이 구축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공상과학소설, 만화, 음악 등 마이너 문화에서 팬들이 스스로 창작하고, 잡지를 만들고, 소식을 공유하며 하나의 자율적 문화권을 형성했다.
주류 바깥에서 시작된 문화
처음의 팬덤은 기성 사회로부터 이상하게 여겨졌다. 팬픽(fan fiction), 굿즈 제작, 비공식 모임 등은 정식 유통 구조 밖에서 이루어졌고, ‘비이성적’, ‘몰입이 과한 집단’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팬덤은 조직화되고, 인터넷과 SNS의 확산 속에서 콘텐츠 유통과 창작에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팬들은 단순히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음원 순위, 스트리밍, 해외 홍보, 번역 작업 등 콘텐츠의 유통과 인식 구조에 직접 개입하는 주체가 되었다.
단어는 바뀌지 않았지만, 사회가 바뀌었다
지금 ‘팬덤’은 더 이상 조롱의 말이 아니다. 단어 자체는 그대로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달라졌다. fanatic에서 유래한 말이 이제는 연대, 창의성, 자발적 조직과 연결되는 단어가 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언어 변화라기보다는 사회인식의 이동이 단어의 의미를 새롭게 만든 사례다. ‘팬덤’이라는 단어에 담긴 감정은 시대에 따라 사회가 덧붙인 것들이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면서 현실을 구성한다
오늘날 fandom은 취향의 집합이자 정체성이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한 콘텐츠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우리는 더 이상 fandom이라는 단어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살아간다. 단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이지만 때로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과 연결하는 언어의 구조 그 자체가 된다.